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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크루즈 94년 내한땐 美전투기도 태웠죠" 워너 코리아 31년 이끈 흥행 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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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영화홍보사 사무실에서 만난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전 사장 박효성씨. “영화는 정답 없는 문제풀이 과정”이라는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31년이란 긴 시간이 지금은 마치 영화같다. 제가 가진 지식과 상식, 경험을 필요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진 배경은 그가 한국에 배급했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포스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중구 영화홍보사 사무실에서 만난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전 사장 박효성씨. “영화는 정답 없는 문제풀이 과정”이라는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31년이란 긴 시간이 지금은 마치 영화같다. 제가 가진 지식과 상식, 경험을 필요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진 배경은 그가 한국에 배급했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포스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90년대를 풍미한 ‘죽은 시인의 사회’ ‘귀여운 여인’ ‘보디가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화성침공’부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천만영화 ‘인터스텔라’까지. 흥행의 중심엔 이 남자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 직배사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출범 이듬해인 90년 1월 입사해 지난달 은퇴까지 31년간 일한 박효성(65) 전 사장이다. 80년대 말 포문을 연 할리우드 직배사 시대 최장수 일꾼이자 산증인이다. 한국이 세계적 영화 시장으로 우뚝 선 과정을 목격했다. 지난 6일 본지와 만난 그는 지난 31년을 “도전의 연속”이라 요약했다.
지난달 개봉한 마지막 작품 ‘원더 우먼 1984’까지 그간 배급을 진두지휘한 영화가 352편. 스크린쿼터, 한국 멀티플렉스 시대를 거치며 ‘매트릭스’ ‘해리 포터’ ‘배트맨’ 시리즈 같은 프랜차이스 영화 신드롬을 일으켰다. 아홉 번이나 내한한 친한파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의 최초 방한을 성사시킨 것도 그다. 1994년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때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갑자기 전투기를 타고 싶다고 해서 미대사관까지 백방 알아봐, 미군 오산비행장에서 전투기를 태워줬죠. 친필로 ‘고맙다. LA 오면 연락하라’고 편지를 주더군요.”

31년 근속한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서 #지난해 12월 은퇴한 박효성 전 사장 #352편 배급한 영화 직배사 산증인 #1994년 톰 크루즈 첫 내한 성사,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 흥행 이끌어

디지털화 전엔 20㎏ 필름 극장마다 배달했죠 

1994년 첫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오른쪽)가 당시 개봉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포스터를 보고 있다. 왼쪽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박효성 전 사장이다. [사진 박효성]

1994년 첫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오른쪽)가 당시 개봉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포스터를 보고 있다. 왼쪽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박효성 전 사장이다. [사진 박효성]

직배사 초기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 많았다. 영화 제목에 영어를 못 쓰게 하던 시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의 원제를 지키려고 진땀도 뺐다. “공연윤리위원회가 ‘국민정서에 안 맞다. 어디 잘라라’ 하면 잘라야 했던” 엄혹한 검열의 시대도 지나왔다.
영화 디지털화도 큰 사건으로 꼽았다. “그전엔 직접 미국에 가서 20㎏짜리 필름 수백개를 들고와선 하나하나 자막까지 쳐야 했죠. 스크린쿼터(극장이 자국 영화를 일정일수 이상 상영하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있을 땐 극장마다 스크린쿼터를 못 채웠다며 한 열흘 틀다 마음대로 내려버려서, 저희가 거래하는 극장마다 일일이 상영 일수를 세기도 했어요. ‘리쎌 웨폰 2’는 틀 수 있는 데가 11곳밖에 없어서 필름 11개를 제 차에 싣고 일일이 배달했죠. 필름을 갖고 온 마지막 영화가 2013년 ‘잭 더 자이언트 킬러’이니 디지털화가 된 지도 얼마 안 지났어요.”

1998년 영화 '다크 앤젤'로 내한한 할리우드 배우 덴젤 워싱턴(왼쪽부터)과 박효성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전 사장. [사진 박효성]

1998년 영화 '다크 앤젤'로 내한한 할리우드 배우 덴젤 워싱턴(왼쪽부터)과 박효성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전 사장. [사진 박효성]

92년 디즈니 코리아 출범 전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국 배급을 맡아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을 배급하기도 했다.
입사 4년만인 94년 능력을 인정받아 사장 승진한 뒤 그는 매해 워너브러더스 본사와 한국시장에 맞는 영화를 상의하고 개봉전략을 짰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 영화 ‘폴링다운’이 재미교포 비하 장면 탓에 한국에서 보이콧 운동이 일어 결국 극장에서 내린 것이다. “광고‧선전비를 다 집행한 때라 접는다는 게 어려웠죠. 그런데 미국 본사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예상되면 하지 말자고 했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크게 부딪히지 말고 법을 철저히 지키란 게 워너브러더스 방침이죠. 저도 많이 배웠어요.”

타임워너 회장 서재에 한국 소주 얽힌 사연

2007년엔 딕 파슨스 타임워너 회장이 방한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글로벌 마켓에서 그 성적이 미미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전세계 15위에 들었고 지금은 5위까지 성장했다. 파슨스 회장이 방한해 특별한 전달사항 없이 ‘앞으로도 잘해달라’ 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격려로 들렸다. 방한 감사 의미로 우리 직원들이 선물한 소주 한병이 지금도 파슨스 회장의 서재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다고 들었다.”

한국이 세계적 영화시장으로 주목받은 계기를 꼽자면.  

“한국영화시장이 갖고 있던 잠재력이 환경변화에 따라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고 많은 자본이 영화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관객이 더 편하게, 더 좋은 시설로, 가까이서 영화를 즐기게 만든 점이 결정적이다. 과거에도 한국영화는 종사자들의 자부심이 높았는데 시장환경의 변화가 잠재해있던 가능성을 폭발시켰다.”

영화 '인터스텔라'로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자필로 감사를 표한 사인지를 보내왔다. [사진 박효성]

영화 '인터스텔라'로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자필로 감사를 표한 사인지를 보내왔다. [사진 박효성]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는 한국에서 특히 사랑받았다. ‘인터스텔라’는 북미‧중국 다음가는 세계 3위 흥행을 거뒀다.  

“놀런 감독이 ‘인터스텔라’ 성공 이유로 ‘한국관객 수준이 매우 높아서’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동의한다. 어려운 내용임에도 영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한국 관객들의 능력이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잘 맞아떨어졌다. 기존 우주 배경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섬세한 감정표현도 호소력이 컸다.”

워너 시리즈물 중 최고 흥행작은.  

“‘해리 포터’다.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익이 좋았다. 시리즈물 중엔 ‘컨저링’도 기억에 남는다. 공포 장르 특성상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란 전략으로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 선택의 다양성과 취향의 폭이 넓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준 높은 비평 쏟아내는 한국관객이 최고 성과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전 사장 박효성씨가 지난 31년간 자신이 배급한 영화들의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전 사장 박효성씨가 지난 31년간 자신이 배급한 영화들의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워너브러더스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2016)을 시작으로 ‘마녀’ ‘장사리:잊혀진 영웅들’ ‘조제’ 등 한국영화 11편의 투자‧배급도 했다. 그중 범죄영화 ‘브이아이피’는 여성묘사, SF ‘인랑’은 만듦새 탓에 비판도 받았다. 그는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미국 회사에서 출발했지만, 한국 시장과 함께 성장한다는 대의를 갖고 운영됐다”면서 “각 영화의 성패보다 그런 시도와 도전에 있어서 모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30년간 한국영화계의 최고 성과로는 “과거엔 상영되는 영화를 그저 보기만 했던 관객들이 이제 수준높은 비평을 쏟아내는 능동적 영화 소비자로 변한 것”이라고 짚었다.

영화 모르고 살다, '죽은 시인의 사회' 40번 봤죠

그에게 영화는 신기한 인연이다. 20대 땐 80년대 중동 건설 붐 속에 건설회사, 무역회사를 거쳤다. 젊은 혈기에 일하는 게 좋았단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입사 전까지 영화는 중학교 때 단체관람한 ‘닥터 지바고’ 등 3편 본 게 다였다. ‘좋은 회사’란 지인 소개에 직원 10명이 채 안 되는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 면접을 봐 들어오고부턴 한 영화를 5~10번씩 반복 관람했다, 좋은 영화를 잘 소개하려는 욕심에서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40번 보기도 했다.

지난해 은퇴 당시 박효성 사장이 31년 세월을 보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맞춰준 기념 케이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케이크엔 그의 영어 이름과 함께 영화 '인턴'의 명대사 ″경험은 결코 나이들지 않는다(Experience never gets old)″ 등 그간 배급한 워너브러더스 영화들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다. 맨아래 신카피(SYNCOPY)는 워너브러더스와 오랫동안 손잡아온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사 이름. [사진 박효성]

지난해 은퇴 당시 박효성 사장이 31년 세월을 보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맞춰준 기념 케이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케이크엔 그의 영어 이름과 함께 영화 '인턴'의 명대사 ″경험은 결코 나이들지 않는다(Experience never gets old)″ 등 그간 배급한 워너브러더스 영화들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다. 맨아래 신카피(SYNCOPY)는 워너브러더스와 오랫동안 손잡아온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사 이름. [사진 박효성]

지난해 2월로 예정했던 은퇴를 연말로 미룬 건 코로나19 대응 때문이다. 지난해 극장 관객이 급감하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도 매출이 약 70% 줄었다.
“코로나가 우리의 신념과 의지까지 무너뜨릴 수 없다고 확신한다”는 그는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를 문득 떠올렸다. “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친절을 받은 사람이 다시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죠.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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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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