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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엔 “돌이킬 수 없는 단계” 일본 향해선 “try me”…과거 발언으로 본 정의용 외교觀

중앙일보

입력

여야가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을 2월 초로 협의하는 가운데 정 후보자의 정책 관련 과거 발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가안보실장으로서 한 발언을 통해 주요 외교 사안에 대한 정 후보자의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다. 동시에 이는 청문회에서 정 후보자의 정책 역량을 검증하는 척도가 될 전망이다.

① 믿었던 '탑 다운' 성과는 없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정 후보자는 2018년 3월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1차 북ㆍ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는 계기마다 트럼프 행정부가 선호한 ‘톱 다운’ 접근법의 장점을 강조했다. 그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한 해 성과를 평가하며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본격적으로 재개됐는데, 이는 톱다운 형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미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른 ‘바텀 업’ 접근법을 선호할 뿐 아니라 기존 대북정책과 차별화된 ‘새로운 전략’을 채택하겠다는 점을 공식화한 상태다. 정 후보자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서 경험한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의 북·미 관계가 예고되면서 북한 비핵화 협상이 한층 험난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 후보자는 그간 수차례에 걸쳐 트럼프 행정부의 탑다운 방식을 긍정 평가하며 성과를 강조했는데,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하노이 노딜 등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며 “지금까지의 한국은 북·미 관계의 중재자라기보단 단순한 ‘전달자’에 가까웠는데, 이제라도 구체적인 중재안을 도출하고 북·미 양측을 설득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당시 정의용(가운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서훈(왼쪽) 국가정보원장, 조윤제 주미대사와 함께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 결과에 대해 브리핑하는 모습. 정 실장은 당시 1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주미대사관]

2018년 3월 당시 정의용(가운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서훈(왼쪽) 국가정보원장, 조윤제 주미대사와 함께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 결과에 대해 브리핑하는 모습. 정 실장은 당시 1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주미대사관]

정 후보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도 수차례 공개적으로 강조했다. 2018년 12월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북한도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지난 8차 당 대회에서 "당 중앙은 역사적인 2017년 11월 대사변(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핵무력 고도화를 위한 투쟁을 멈춤 없이 줄기차게 령도해 거대하고도 새로운 승리를 쟁취했다"며 남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핵 개발을 계속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②존재감 없이 소멸 '굿 이너프 딜' 구상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4.27 판문점 선언'을 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4.27 판문점 선언'을 했다. [연합뉴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만 내주면 제재 해제를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의 최종 목표와 전체적인 로드맵 합의가 우선이라며 ‘노 딜’을 선언했다. 당시 한국이 중재자를 자처하며 양측의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배달 사고’를 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는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ㆍ충분한 합의)’이란 개념을 고안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2019년 3월 17일 “‘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선 북한이 포괄적 목표 달성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하도록 견인하고, 이런 바탕에서 ‘스몰 딜’을 ‘굿 이너프 딜’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면서다.

2019년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은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뜻에서 '하노이 노 딜'로 불렸다. [연합뉴스]

2019년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은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뜻에서 '하노이 노 딜'로 불렸다. [연합뉴스]

당시 청와대의 방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견지해온 ‘빅 딜’만 고집해선 비핵화 협의가 진전될 수 없다는 데 찍혔다. ‘스몰 딜’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잘게 나눠 보상을 최대한으로 챙기는 살라미 전술의 일환으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해 제안한 게 ‘굿 이너프 딜’이었던 셈인데, 정 후보자가 실장으로 있던 국가안보실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한ㆍ미 간 이견 표출로 이어졌다. 2019년 4월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북핵 협상은 '빅딜'과 '굿 이너프 딜' 사이의 선택이 아닌 '노딜'(결렬)과 배드딜'(나쁜 합의) 사이의 문제”라고 말했다. 특히 ‘굿 이너프 딜’에 대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남겼다.

굿 이너프 딜은 바이든 행정부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지명자가 북한 비핵화 모델로 강조한 이란 핵 합의와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핵 신고 및 사찰 등 검증을 대가로 한 제재 완화가 이란 핵 합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국민의힘 소속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의 비핵화 협상은 심하게 얘기하자면 성과없이 소리만 요란했던 수레에 가까웠다”며 “정 후보자가 청와대 안보실장으로서 주요 시기마다 홍보해 온 외교 성과가 부풀리기 아니었는지에 대한 점을 청문회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③일본 향해선 'try me' 경고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청와대 안보실장 재직 당시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특히 지소미아 종료 결정 유예와 관련 일본의 왜곡보도에 항의하며 "'try me'라고 일본에 말하고 싶다"는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청와대 안보실장 재직 당시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특히 지소미아 종료 결정 유예와 관련 일본의 왜곡보도에 항의하며 "'try me'라고 일본에 말하고 싶다"는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연합뉴스]

정 후보자의 발언 중 외교가에서 가장 회자했던 건 일본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한ㆍ일은 2019년 11월 22일 외교적 협의 끝에 한국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유예하고, 일본은 수출 규제 조치 해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재개하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 언론들이 이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며 “퍼펙트 게임” 등으로 표현하자, 정 후보자는 이틀 뒤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일본을 저격했다. 당시 그는 “‘Try me(어디 한 번 그런 식으로 계속 해보라)’라고 일본에 말하고 싶다. 계속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경고”라고 말했다.

일본의 왜곡을 문제 삼는 건 당연하지만, 당시는 이미 외교 채널을 통한 공식 항의가 이뤄진 뒤였다. 한국의 외교안보 라인 책임자가, 그것도 잘 해보자고 기껏 어렵게 합의를 해놓은 뒤 공개적으로 할 성격의 발언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외교적 표현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에 한동안은 정 후보자의 이야기만 나오면 ‘try me’가 호처럼 그의 이름에 붙어다녔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 후보자는 일본에 대한 전략적 신뢰가 강하지 않다고 보여지는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무엇보다 ‘유연성’과 일본에 대한 신뢰를 갖추는 게 급선무”라며 “특히 위안부 문제의 경우 문재인 정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가 공식 합의란 점을 강조하면서 자기부정에 가까운 형태로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있는데, 당면한 문제를 넘기 위한 ‘꼼수’가 아닌 대화와 협상, 그리고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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