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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김정은의 시간, 문재인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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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분리선은 너무나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인데 역사적인 이 자리까지 11년이 걸렸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마주 앉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마디였다. 그는 ‘잃어버린 11년’이란 표현을 여러 차례 쓰면서 “지난 시기처럼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 낙심을 주지 않겠나”고 했다.

임기 1년여 남은 문재인 정부 #싱가포르 방식 복원에 집착하면 #미국과 멀어지고 북에 휘말릴 수도

그가 말한 ‘지난 시기’란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10·4 남북 정상회담을 뜻한다. 그때 합의문에 담긴 약속들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김정은은 ‘잃어버린 11년’의 책임을 은근슬쩍 남한 탓으로 돌려버리며 핵 개발로 제재를 자초한 책임은 모른 척했다. 사실 10·4 합의는 발표 당시부터 지켜지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불과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들을 총망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임기 말의 정권과는 섣불리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이때 절감했을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거듭되는 제안에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냉랭함도 남은 임기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문 대통령도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하던 일을 차분히 마무리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야 말겠다며 가속 페달을 더욱 세게 밟을 수도 있다.

대통령의 선택은 정의용 전 안보실장을 외교부 장관에 지명한 데서 분명히 드러났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 협상해 나간다면 속도감 있게 북·미 및 남북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대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는 게 그의 임무일 것이다. 이번 인사로 완성된 정의용-서훈(안보실장)-박지원(국가정보원장) 라인은 김대중(DJ) 정부 이래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들이다. 남은 임기 안에 반드시 뭔가를 성사시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K5(5년 재임)가 될지 모른다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밀어냈다. 우직하게 가던 길을 가겠다는 집념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경건함은 높이 살 만하지만 유연한 현실 감각이 보이지 않는 게 유감일 따름이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 새 행정부와의 인식 차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성과 없는 리얼리티쇼라 규정하고 그 사이를 틈탄 북한의 핵무장 강화를 막지 못한 실패작으로 평가한다. 북·미 회담 중재자였던 정의용 후보자는 “비핵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했고, 북한도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와 조율된 정책을 마련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 김정은의 머릿속은 바이든 행정부의 동향을 탐지하고 향후 행보를 예측하는 것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정은이 대화든 도발이든 먼저 서두르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는 “시간은 우리 편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때 “우리는 (5년 전에 비해) 강해졌으며 시련 속에서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며 한 말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응하면서도 부단히 핵무력을 증강시킨 데 대한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노림수는 올해 초 당 대회에서 비핵화란 단어를 단 한 차례도 쓰지 않고 공화국 무력의 증강만을 30여 차례 강조한 점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겉으로라도 비핵화를 주장해 오던 북한이 속셈을 드러내면서 군축회담을 주장하고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한반도의 운명은 이처럼 엄중한 시기에 와 있다. 미국과 북한의 치열한 수 싸움이 시작됐건만 한국은 오직 한 길, 싱가포르 방식의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한쪽은 시간이 우리 편이라 자신하고, 한쪽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초조해 한다. 싸움이건, 담판이건, 협상이건 서두르는 쪽이 불리한 법이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