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기재부의 나라’가 어때서

중앙일보

입력 2021.01.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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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

구박·겁박·협박의 대상이 된 기재부
재정은 경제 체질 개선되도록 쓰고
‘멀리 길게’ 보고 구박 당당히 견뎌야

정세균 국무총리는 21일 소상공인 손실보상제의 법제화에 미적대는 기획재정부를 개혁 저항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자린고비’라고 비난해온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거들었다. 이 지사는 “기재부의 예산권 독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정도가 심해지다 보니 급기야 총리님까지 나서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질책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3일 방송에서 정 총리와 이 지사를 겨냥해 쓴소리를 했다. “기획재정부 곳간 지기를 구박한다고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이 대표가 총리 시절, 홍 부총리는 총리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이었다. 이 대표 발언은 옛 부하를 보호하려는 애틋한 마음의 소산일 수 있다. 하지만 ‘구박’이라는 표현에서 기재부의 현재 위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구박의 사전적 의미는 ‘못 견디게 괴롭힘’이다. 단어에서부터 심각한 갑을 관계가 느껴진다.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은 24일 페이스북에 “이 지사가 돈 풀기를 위해 경제부총리를 겁박하는 태도는 비겁하다. 이 정부의 경제정책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으면 ‘심약한’ 경제부총리를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당히 말하고 따지시라”고 썼다. 같은 당 원희룡 제주지사도 이날 페이스북에 “이 정도면 토론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올렸다.

경제부처의 수장인 기재부가 어쩌다 구박·겁박·협박의 대상으로 전락했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서소문 포럼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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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경제부처를 담당하며 기재부(옛 재정경제부 포함)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당당하고 능력 있는 이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존재감 잃은 기재부는 과거에 없었다. 가히 ‘기재부 실종사건’이라고 부를 만하다. 심지어 행정고시 성적 선두권이 몰리던 인기부처였던 기재부가 요즘엔 5급 신임 공무원의 부처 지원 순위에서 꼴찌로 떨어졌단다.

왜 이렇게 됐을까. 흔히 부드러운 스타일의 홍남기 부총리 탓을 하는데 반만 맞는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초기의 경제정책 ‘투톱’이었던 김동연 전 부총리와 장하성 전 정책실장의 ‘김앤장 갈등’에 학을 뗀 청와대가 ‘무난한’ 부총리를 선택했고 홍 부총리도 대체로 기대에 부응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정책 주도권이 이미 정부 부처에서 국회와 청와대로 옮겨가는 큰 흐름은 아무리 그립 강한 장관이 와도 거스르기 힘들었다고 본다. 기재부만 그런 게 아니다. 공매도 재개를 추진하던 금융위원회도 정치권의 무차별 공격에 납작 엎드렸다. “국회·총리도 무시하는 금융당국이 불쾌하다”(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등 SNS 직격탄에 금융위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라 재정을 지키는 곳간 지기는 기재부의 별칭이자 영예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랏빚과 국고를 관리하는 기재부 국고국장 중에 명함을 아예 ‘대한민국 CFO’라고 찍고 다니는 분도 있었다. 곳간 열쇠를 관장한다는 자부심이 넘쳤다.

곳간 인심은 많이 후해졌다.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 40%선은 이미 넘어섰고 더 이상 연연해하지도 않는다. 요즘엔 무조건 재정을 아끼라는 주문 대신, 이왕 쓰려면 제대로 써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세월 참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돈을 쓰고 싶어도 제대로 된 예산사업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현 정부 들어 예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내용 알차고 규모가 큰 사업을 발굴하기는 점점 어렵게 됐다. 그러니 당장 급한 곳에 현금을 살포하는 식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왕이면 과도한 자영업자 비중을 줄이고 중소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경제 체질을 개선하는 쪽으로 재정을 풀 수는 없을까.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는 총리와 지사의 우격다짐에 ‘기재부의 나라가 어때서’ 라고 한 말씀 드린다. 제대로 된 곳간 지기가 있는 ‘기재부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

홍 부총리는 4월 1일이면 역대 최장수 기재부 장관인 윤증현 전 장관의 기록(842일)을 뛰어넘는다. 그가 기록을 깰지에 별로 관심 없다. 다만, 그가 그래도 마지막엔 할 말을 제대로 했다는 평가를 남겼으면 한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는 말에서 그치지 말고.

2010년 윤증현 당시 장관이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시간을 이길 만큼 내구성 좋은 정책은 조바심낼 때가 아니라 멀리 보고 길게 호흡할 때 가능한 것이다.” 기재부 공무원께 힘내시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구박을 견디고 겁박과 협박에 담대히 맞서시라.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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