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생경한 워싱턴 풍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임종주 워싱턴총국장

임종주 워싱턴총국장

그날 워싱턴 DC 거리는 진흙투성이였다. 덤불로 뒤덮여 지나다니기도 어려웠다. 연방정부 조성 공사 탓에 경관도 어수선했다. 3대 대통령 당선인 토머스 제퍼슨은 그 길을 걸어서 의사당에 도착했다. 미국 의회 사료가 전한 1801년 3월 4일, 첫 연방의사당 대통령 취임식 날 풍경이다.

제퍼슨은 상원 회의실 취임식에서 “소수자도 법이 보호해야 하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고, 그 신성한 원칙을 저버리는 것은 억압”이라며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치열했던 선거전에서 자신을 찍지 않았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거나 권리를 침해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단합의 호소였다.

180년 후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전통적 취임 무대로 자리 잡은 이스트 포르티코(의사당 동쪽 출입구)를 떠나 웨스트 프론트(서쪽 테라스)에서 취임했다. 더 많은 인파와 함께할 수 있는 위치다. 레이건은 오일 쇼크와 불황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에게 국가 부흥의 시대를 시작하자고 용기를 북돋웠다.

글로벌 아이 1/26

글로벌 아이 1/26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 취임식이 열린 곳이 바로 그 웨스트 프론트다. 수십만 축하 행렬 대신 성조기와 각 주의 깃발이 무대 앞 내셔널 몰을 빼곡히 채웠다. 코로나 대유행의 파고 속에 폭도들이 의사당을 유린한 2주 전 상흔도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바이든의 양어깨엔 제퍼슨의 ‘단합’과 레이건의 ‘부흥’, 두 난제가 얹혀졌다.

바이든이 돌파구로 던진 화두는 통합이다. 코로나로 황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고 좌우로 두 쪽 난 국가의 통합을 위해 영혼까지 바치겠다며 통합의 리더를 자처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반 이민 정책을 비롯한 미국 우선주의와, 대외문제 불간섭 원칙인 트럼프 독트린을 모두 폐기했다. 트럼프 현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바로 그 발원지들이다.

“공화당원 10명 가운데 6명 가량(57%)은 당 지도부가 트럼프의 유산을 따르기를 원한다”(워싱턴포스트-ABC). 또 70%는 여전히 바이든의 합법적 승리를 부인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통합 추진에도 강력한 정치적 분열이 지속할 것”(정치전략가 프랭크 런츠)이라는 회의론도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공화당원이나 트럼프 지지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민주당 내 진보주의자를 어떻게 설득해 나갈 것인가도 바이든의 만만치 않은 과제다.

트럼프 지우기로 첫날을 시작한 바이든식 통합은 아직 안갯속이다. 그 자신도 “어리석은 판타지처럼 들릴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어떻게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철조망과 주 방위군이 어른거리는 워싱턴은 여전히 생경하다. 220년 전 그날의 스산한 풍경처럼.

임종주 워싱턴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