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취재일기]영혼 없는 경제관료, 동네북 된 기재부

중앙일보

입력 2021.01.25 15:34

예로부터 곳간 지기는 우대받았건만, 요즘 대한민국 곳간 지기는 영 아니다. 연일 ‘동네북’ 신세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얘기다. 홍 부총리를 겨냥한 십자포화는 최근에도 이어졌다.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20일 정세균 국무총리)
“재정 건전성을 외치면서 무조건 적게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23일 이재명 경기도지사)
“기재부 곳간 지기를 구박한다고 뭐가 되겠나.”(23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낙연 대표 얘기까지 듣고 있자니 서글펐다. ‘구박’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다그칠 땐 써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구박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초라한 기재부 신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믿고 따라야 할 ‘경제 컨트롤타워’ 수장을 둘러싸고 청와대ㆍ당에 밀려 번번이 소신을 접었다는 취지에서 ‘홍백기(白旗, 항복의 의미)’, ‘홍두사미(홍남기+용두사미)’란 말이 떠돌 정도니 오죽할까.

지난해만 해도 여당이 4차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긴급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 등을 밀어붙이고, 홍 부총리가 반대 의견을 냈다가 접는 일을 반복했다. 그 와중에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홍 부총리 경질을 언급하거나(3월), 홍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가 대통령이 반려하는 일(11월)까지 일어났다. 경제부총리 자리가 학급회장 자리도 아닌데 그만둬라 말라 하거나, 그만두겠다 했더니 말리는 촌극을 빚었다. 격무에 시달리는데, 부총리마저 이리저리 치일 정도니 5급 공무원시험(행정고시)의 꽃으로 불리는 ‘재경직’ 합격자조차 기재부를 기피하는 추세다.

추락한 기재부 위상은 세 개 조합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무책임한 관료, 밀어붙이는 여당, 방관하는 대통령. 한 전직 경제부총리는 “과거에도 청와대ㆍ여당과 기재부 입장이 다를 때가 있었지만, 부총리가 공개 사표까지 들고나온 적은 없었다”며 “이견이 있더라도 최소한 국민 앞에선 일치한 입장을 보여줘야 하는데 부끄럽다”고 꼬집었다.

‘기개 넘치는’ 경제관료와 ‘기개를 받아준’ 대통령은 추억으로만 남겨야 하나. 1969~1974년 재무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고(故) 남덕우 전 총리, 김재익 경제수석을 가리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좋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통령과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주장할 것은 끝까지 밀어붙여 관철한 뚝심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명(名)재상으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거침없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회자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대통령이라고 다 아는 것 아니잖느냐”며 경제정책 소신을 밀어붙인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과 소신을 받아준 MB가 있었다.

최근 새 정부가 출범한 미국 재무부의 위상과도 대비됐다. 달러 지폐 7종류 중 대통령을 지내지 않고도 모델로 등장한 인물은 2명이다.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과 초대 재무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해밀턴은 연방정부와 소통해 독립전쟁을 치르며 쌓인 나랏빚 문제를 해결하고 미국 경제의 초석을 닦았다. 미국에선 그를 10달러 지폐에 그려 기린다.

경제관료는 테크노크라트(전문 기술을 갖춘 관료)로서의 영혼(소신)을, 청와대ㆍ여당은 큰 정치가로서의 영혼(나라의 미래)을 챙길 때다. 나라 곳간을 든든히 지키면서도, 필요할 땐 과감하게 푸는 게 경제부총리의 임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청와대와 국회뿐 아니라 국민까지 모든 플레이어를 설득한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청와대ㆍ여당은 문재인 정부의 진짜 성공을 위해서라도 선거를 염두에 둔 포퓰리즘 대신 경제만큼은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 내년이면 나랏빚이 1000조원에 이른다. 이래저래 각자 영혼을 다잡을 때가 왔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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