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곡선을 거느린 듯, 제주 용눈이오름 2년간 못 간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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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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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오름에 안개가 내렸다. 제주 중산간에선 흔한 풍경이다. 10년쯤 전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용눈이오름에 안개가 내렸다. 제주 중산간에선 흔한 풍경이다. 10년쯤 전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용눈이오름을 2월부터 오를 수 없다. 제주도청은 제주시 구좌읍 용눈이오름이 2021년 2월 1일부터 2023년 1월 31일까지 2년간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탐방객 증가로 인한 훼손 가속화”가 시행 근거다. 자연휴식년제가 시행되면 용눈이오름 출입이 전면 통제된다. 무단출입하면 2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전체 368개 오름 중 최고 인기
내달 1일부터 자연휴식년제
“탐방객 증가로 훼손 심해져”

용눈이오름은 368개나 된다는 제주 오름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오름이다. 각종 TV 프로그램과 영화, CF에 여러 번 등장했다. 그 과열된 인기가 끝내 용눈이오름을 앓게 했다. 외려 잘된 일이겠다. 용눈이오름도 잠깐이나마 쉴 수 있게 됐으니. 자연휴식년제는 보통 2년 시행하지만,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 현란한 곡선을 다시 밟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자, 막상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나는 2003년부터 용눈이오름을 올랐었다. 그 시절 용눈이오름에는 때 묻지 않은 제주가 있었다.

못생긴 오름

헬기에서 촬영한 용눈이오름. 용이 누운 것처럼 보이시는지. 용눈이 오름 뒤에 서 있는 잘 생긴 화산이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오름 오른쪽으로 아끈다랑쉬오름도 보인다. '아끈'은 '작은'이란 뜻의 제주 방언이다. 손민호 기자

헬기에서 촬영한 용눈이오름. 용이 누운 것처럼 보이시는지. 용눈이 오름 뒤에 서 있는 잘 생긴 화산이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오름 오른쪽으로 아끈다랑쉬오름도 보인다. '아끈'은 '작은'이란 뜻의 제주 방언이다. 손민호 기자

제주시 송당사거리에서 1136번 간선도로를 타고 성산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른바 ‘오름 밭’이 나타난다. 동부 오름 군락이라 불리는 이 중산간 초원에 오름 수십 개가 올록볼록 돋아 있다.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사이를 지나면 도로 오른쪽으로 미끈하게 솟은 손자봉이 보이고, 왼쪽에 곡선 여러 겹이 어지러이 엉킨 언덕배기가 나타난다. 이 울퉁불퉁한 구릉이 용눈이오름이다.

용눈이오름은 낮고 평평하다. 해발고도는 248m이지만 비고는 88m에 불과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용눈이’라는 귀여운 이름은 독특한 생김새에서 비롯됐다. 용이 누운 것처럼 생겨 용눈이오름이다. 한자 이름도 ‘용와악(龍臥岳)’이다.

용눈이오름의 외모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름이라기보다는 약 2.7㎞ 둘레의 널찍한 구릉에 가깝다. 능선의 한쪽은 용암이 흘러나와 터졌고, 다른 능선도 원형을 이루지 못하고 비뚤배뚤하다. 봉우리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지만, 봉우리도 세 개나 있다. 봉우리가 세 개 있으니 굼부리(‘분화구’의 제주 방언)도 세 개다. 용눈이오름은 최소 세 번 이상의 분화 활동을 거친 복합화산이다. 하여 이렇게 복잡하고 헝클어진 모습의 오름이 누워 있을 수 있었다.

해 뜰 무렵 다랑쉬오름에 올라 찍은 동부 오름 군락. 능선을 따라 삼나무가 서 있는 맨 앞의 오름이 손자봉이고, 손자봉 뒤로 여러 겹의 곡선이 겹쳐진 언덕이 용눈이오름이다. 멀리 성산일출봉도 보인다. 손민호 기자

해 뜰 무렵 다랑쉬오름에 올라 찍은 동부 오름 군락. 능선을 따라 삼나무가 서 있는 맨 앞의 오름이 손자봉이고, 손자봉 뒤로 여러 겹의 곡선이 겹쳐진 언덕이 용눈이오름이다. 멀리 성산일출봉도 보인다. 손민호 기자

오름은 소(小)화산체를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옛날엔 ‘기생화산’이라 했었다). 소화산체는, 규모는 작지만 독립한 분화 활동으로 생성한 지형이란 뜻이다. 다랑쉬오름처럼 반듯한 화산 모양의 오름도 있지만, 용눈이오름처럼 허물어지고 무너진 오름도 있다. 용눈이오름이 받았던 유난한 사랑도, 오름으로 치면 저 못난 외모 때문이었다. 이 못생긴 오름이,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곡선을 거느린 듯한 기이한 풍광처럼 비쳤다. 제주 오름을 세상에 알린 제주 언론인 고(故) 김종철(1927∼1995) 선생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용눈이오름은 부챗살 모양으로 여러 가닥의 등성이가 흘러내려 기이한 경관을 빚어낸다. 등성이마다 왕릉 같은 새끼봉우리가 봉곳봉곳하고 뒤엔 돌담 둘린 무덤들이 얹혀 있다.… 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미궁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에 빠진다. - 김종철, 『오름 나그네 1』, 105쪽

곡선이 있고 또 곡선이 있고 또 곡선이 있는 이 가냘픈 풍경. 용눈이오름이 거느린 곡선의 세상이다. 손민호 기자

곡선이 있고 또 곡선이 있고 또 곡선이 있는 이 가냘픈 풍경. 용눈이오름이 거느린 곡선의 세상이다. 손민호 기자

곡선의 세상

김영갑이 남김 용눈이오름의 현란한 곡선. 능선에 올라 다른 능선을 바라봤다. 능선 너머로 멀리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사진 김영갑갤러리]

김영갑이 남김 용눈이오름의 현란한 곡선. 능선에 올라 다른 능선을 바라봤다. 능선 너머로 멀리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사진 김영갑갤러리]

제주 오름을 세상에 알린 인물은 김종철이지만, 용눈이오름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은 김영갑이다. 두 명 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고(故) 김영갑(1957∼2005)은 18년간 오름 사진을 찍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은 사진작가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오브제가 용눈이오름이었다. 용눈이오름이 거느린 어지러운 곡선의 세상이었다.

오래전 김영갑이 섰던 자리에 서 봤다. 옛날과 달리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푸른 풀이 죽어 붉은 흙이 드러났다. 손민호 기자

오래전 김영갑이 섰던 자리에 서 봤다. 옛날과 달리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푸른 풀이 죽어 붉은 흙이 드러났다. 손민호 기자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82쪽.

이른바 '제주도 왕따나무'와 용눈이오름. 소지섭이 등장하는 TV CF로 유명해진 풍경이지만, 원래는 김영갑이 남긴 장면이다. 이제 이 자리에 이 나무는 없다. [사진 김영갑갤러리]

이른바 '제주도 왕따나무'와 용눈이오름. 소지섭이 등장하는 TV CF로 유명해진 풍경이지만, 원래는 김영갑이 남긴 장면이다. 이제 이 자리에 이 나무는 없다. [사진 김영갑갤러리]

김영갑은 평생 가난했으나 그가 남긴 사진 중엔 유명한 사진도 있다. 허허벌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뒤로 낮은 언덕이 누운 풍경. 이 장면에서 뒤에 엎드린 언덕이 용눈이오름이다. 김영갑은 이 자리에 서서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같은데, 시간과 계절 그리고 바람이 다른 사진들. 다른 오름처럼 산으로 서지 못하고 언덕으로 누운 오름과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 나무에서 그는 평생 혼자 살았던 자신을 발견했었나 보다. 바로 이 지점에서 TV CF도 찍었다. 배우 소지섭이 카메라 모델로 나와서 지금도 인터넷에는 이 나무가 ‘소지섭 왕따나무’로 검색된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의 영화 포스터. 용눈이오름 굼부리(분화구) 안에서 촬영했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의 영화 포스터. 용눈이오름 굼부리(분화구) 안에서 촬영했다.

용눈이오름 굼부리 안에서 바라본 능선. 손민호 기자

용눈이오름 굼부리 안에서 바라본 능선. 손민호 기자

바라보는 자리

2003년의 용눈이오름.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소가 여기저기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손민호 기자

2003년의 용눈이오름.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소가 여기저기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손민호 기자

2003년만 해도 용눈이오름은 소가 노니는 목장이었다. 능선과 기슭 모두 소똥 천지였다. 눈 지 오래돼 말라비틀어진 똥은 물론이고 막 눠서 질펀하고 끈적거리는 소똥도 수두룩했다. 탐방로는커녕 진입로도 없었다. 누군가 철조망 구석에 만들어놓은 작은 틈을 비집으며 오름을 드나들었다. 능선 위 풀밭에 팔베개하고 누워 제주 하늘을 바라보다 까무룩 낮잠이 든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용눈이오름의 옛 모습이다. 용눈이오름에는 2010년을 전후로 야자 매트가 깔렸다. 능선 따라 이어진 탐방로 말고는 출입을 자제하라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오름에 사람이 많아지자, 원래 주인이었던 소가 사라졌다. 오름 아래에는 화장실과 매점을 갖춘 큼지막한 주차장이 들어섰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남아있던 동부 중산간 오름 군락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왔다. 서너 해 전부터 오름 주변 초원을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멀찍이서 용눈이오름을 바라봤다. 용눈이오름은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손민호 기자

멀찍이서 용눈이오름을 바라봤다. 용눈이오름은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손민호 기자

2년이란 시간이 용눈이오름에 주어졌다. 10년 넘게 인간에게 밟히고 뜯긴 시간을 생각하면, 치유와 휴식의 시간으로 턱없이 부족할 테다.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이참에 제주도청에 제안한다. 용눈이오름은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은 오름이다. 용눈이오름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도는 ‘용눈이 보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용눈이오름은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생전의 김영갑도 용눈이오름에 드는 자리보다 바라보는 자리를 선호했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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