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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웅인 "무대는 희열.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연기하러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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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얼음'에서 베테랑 형사 역할로 출연하고 있는 배우 정웅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 '얼음'에서 베테랑 형사 역할로 출연하고 있는 배우 정웅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진: 이 연극 대사가 장난 아니야. 사람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돼. 대사 보면 겁도 나고 질릴 거야.
 정웅인: 진짜? 나 그런거 하고 싶어. 힘든거.

3월까지 연극 '얼음' 출연

배우 정웅인은 2018년 장진 감독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둘은 서울예술대학교 89학번 동기다. “8~9개월쯤 후에 카카오톡이 왔어요. ‘진짜 할 생각 있냐’고. ‘희곡 한 번 보내줘봐’ 했는데. 헤엑! 대사가!” 자그마한 종이를 깨알같이 채운 대사는 배우 두 명이 소화해야할 분량이었다. 장진이 쓰고 연출해 2016년 초연한 연극 ‘얼음’이다.

무대 위의 배우는 두 명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출연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출연하지 않는 그 인물의 대사가 ‘들리는 셈 치고’ 두 배우는 대사를 이어가야한다. 정웅인은 “희곡을 보고 질렸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에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연극 무대 커튼콜 장면의 제 모습을 상상하다가 벌떡 일어났어요. 진이에게 바로 카톡을 보냈어요. ‘얼음. 콜.’”

정웅인은 이달 8일부터 3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얼음’에  ‘형사 1’로 출연하고 있다. 이철민·박호산과 트리플 캐스팅이다. 작품은 장진이 경고한대로 어렵다. 무대 위에는 두 형사가 한 명의 소년을 토막 살인의 용의자로 취조한다. 하지만 소년은 끝까지 무대에 나오지 않는다. 빈 의자만 있을 뿐이다. 두 형사는 그 소년의 대사를 머릿속에서 떠올려가며 극을 끌고 나간다. 소년은 가만히 질문에 대답하다 날뛰며 흥분하곤 한다. 무대 위의 형사들은 그 동선까지 상정해 진폭이 큰 연기를 해내야 한다.

‘얼음’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웅인은 형사1 뿐 아니라 같은 경찰서 ‘윤계장’ 역할로 잠시 1인 2역을 한다. 형사1과 윤계장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는 형사1이 나오지 않는다. 정웅인은 이번엔 형사1의 대사를 상상하며 연기를 펼친다. 여러 겹의 난코스가 도사린 연극이다.

정웅인은 서울예대, 대학로 연극판을 거친 배우다. 영화 ‘두사부일체’(2001년), ‘베테랑’(2015년), 드라마 ‘선덕여왕’(2009년), ‘슬기로운 감빵생활’(2017년) 등으로 흥행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경력이 꽤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이번 작품은 참 어려운 무대”라며 “어려운만큼 희열이 커서 매일 지하철 타고 와 연습하고 공연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수많은 작품을 해본 배우에게 독특한 형식의 연극은 어떤 경험인가.

“처음 대본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공연 직전에 대본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대사가 너무 길었기 때문인데, 막상 해보니 외우는 것보다는 힘 빼기가 정말 어려웠다. 장진 감독이 쓴 그대로, 더 보태지 않고 하는게 참 어려웠다.”

장진 감독과 동기다.

“진이는 대학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방학 동안 같이 울산에 가서 ‘늘근 도둑 이야기’를 공연했다. 1년 선배인 김원해, 나, 진이가 출연하고 코미디언 이병진이 조명을 했다. 그는 지금도 천재다. 오전에 나온 뉴스를 가지고 대본을 만들어서 같은 날 오후 9시에 공연하는 연극은 어떻겠냐더라. 아이디어가 넘친다.”

2018년 ‘리처드3세’ 이후 3년 만의 연극이다. 커튼콜의 어떤 모습을 상상하며 수락했나.

“나는 드라마, 시트콤, 영화에서 얼굴을 알린 배우다. 이름 대면 사람들이 아는 배우 중 하나인데, 무대에서 나를 보고 사람들이 ‘이 사람 원래 연극했지’하는 순간이 있었으면 했다. 연극은 너무 어렵지만, 방송에서 어려운 걸 해냈을 때보다 희열이 열배다.”

맡은 캐릭터를 철저히 준비하는 걸로 알려져있다. 이번 배역은 어떻게 준비했나.

“‘베테랑’에서 트럭 기사로 나올 때 실제 화물차 기사와 함께 운행하며 준비했다. 운전석 오른쪽엔 뭘 두고, 옷은 뭘 입는지 관찰을 했다. 이번에는 대학로에서 한달 반 동안 매일 연습했다. 소속사와 상관 없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 지하철 혼자 타고 매일 갔다. 정자역에서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2호선, 왕십리에서 4호선 타고 혜화역에 왔다. 공연하러 광화문 올 때도 지하철 타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온다. 대학 다닐 때 시장에 가서 사람들 보던 때 같이. 그런데 코로나 마스크 덕분에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객석 두 칸씩 띄어앉기로 공연 중이다. 객석을 무대에 서서 보면 어떤가.

“극은 토막 살인범을 추리하느라 무거운데, 옆자리까지 비어있으니 사람들이 언제 웃고 박수를 칠지 어려워하는 게 느껴진다. 이러다 객석이 반이라도 차면 만석된 느낌이겠지.”

앞으로 연극 무대 계획은.

“이제 2년에 한편씩은 하고 싶다. 저쪽(드라마ㆍ영화)에서 돈 벌고 여기에는 지하철 타고 와서 연기하고 싶다. 연극은 너무나 어렵지만,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자부심을 준다. 관객이 ‘정웅인이 자꾸 달라지네’‘저렇게 생겼는데 따스한 모습도 있었네’하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나의 세 딸이 계속 잘 먹고, 자랄 수 있도록 나중에는 주말드라마 아버지 역할까지 하면서 늦도록 연기하고 싶다. 지금 배우들 중에 아버지 역할 후보가 얼마나 많은지!(웃음)”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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