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신고자 14쪽짜리 문건엔 "김학의 출금은 한국판 미란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24 05:00

업데이트 2021.01.24 06:47

2020년 10월 28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서울고등법원에 출석했다. 연합뉴스

2020년 10월 28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서울고등법원에 출석했다. 연합뉴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2019년 3월 23일 불법 출국금지 의혹 사건에 대해 공익신고자가 ‘한국판 미란다 사건’으로 규정했다. 지난 20일 국민권익위에 제출한 14쪽 분량의 2차 공익신고서에서다.

납치 강간범에 변호사선임권 안 알려 1966년 美 대법 '무죄'

공익신고자는 신고서에서 “아무리 나쁜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도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적법절차에 따라 수사와 재판을 한 후 처벌해야 진정한 법치국가라 할 것"이라며 "이번 사건을 한국판 미란다 사건으로 부르는 분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미란다 사건은 1963년 미국에서 발생했다. 에르네스토 미란다가 납치 강간을 저질렀는데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변호사 선임권과 진술 거부권 등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66년 연방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납치 강간범에게도 예외 없이 방어권은 보장돼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판결이었다.

이 판결 직후 미국 사회 여론은 “법원이 범죄 예방이나 피해자의 권리보다 범죄자, 즉 악인(惡人)의 권리를 더 존중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의자를 연행할 때는 변호사 선임권 등을 미리 알려 줘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이 자리 잡게 됐다. 설사 악인이라도 인권이 보장돼야 가장 힘 없는 약자의 인권도 보호받을 수 있다. 그래야 공권력에 의해 약자가 억울한 피의자가 되는 일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1987년 헌법에서 '미란다 원칙' 명문화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직후인 10월 헌법 개정 때 미란다 원칙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헌법 12조에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않는다'(1항),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않는다'(5항)라며 어떤 예외도 두지 않았다. 대법원은 2000년 “미란다 원칙을 무시한 체포는 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니다”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김종민 전 순천지청장(변호사)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미란다 사건을 언급하며 “김학의 전 차관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무리 중대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도 헌법 등이 보장한 무죄 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차적 정의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라면서다.

정유미 부천지청 인권감독관(부장검사)도 “검사들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수사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판단한다”며 “그 인권이 설령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인간들의 인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썼다.

김학의 전 차관에 대한 불법 출국금지 사건을 수사 중인 수원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이정섭)가 21일 법무부 출입국본부 등을 압수수색했다. 뉴스1

김학의 전 차관에 대한 불법 출국금지 사건을 수사 중인 수원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이정섭)가 21일 법무부 출입국본부 등을 압수수색했다. 뉴스1

“불법 출국금지가 부차적?…무법시대 우려”

하지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김학의 전 차관은 출국금지 당시 "실질적, 사후적 범죄 피의자"였다며 불법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누구의 공익을 위함이냐"고 따졌다.

이에 공익신고자는 출국금지의 위법성 논란을 ‘부차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는 법무부도 비판했다. 그는 신고서에서 “불법 출국금지가 선한 목적을 위한 부차적 문제로 정당화되면 권력기관 종사자들이 증거를 조작해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영장을 허위로 작성해 나쁜 놈을 혼내주는 무법시대로 후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이 공익신고와 그에 따른 검찰 수사를 가리키며 ‘추미애 사단 찍어내기’ ‘김학의 비리 옹호’ ‘과거사 재수사의 정당성 폄훼’ 식으로 보도를 이어가는 것과 관련해선 “공익신고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익신고자는 “공익신고에 정치적 의도나 고려는 전혀 없다”며 “오로지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 인권침해를 바로 잡고 불법을 저지른 자들에게 법에 따른 정당한 처벌을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은 김학의 전 차관과 아무런 인연이 없고 김학의 전 차관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면서다.

“이런저런 핑계로 적법절차 예외 허용 안 돼”

그러면서 한겨레신문 강희철 기자가 2019년 4월 15일 당시 김 전 차관 불법 출금 논란에 대해 썼던 기사 일부분도 인용했다.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적법절차의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그 예외는 나도, 당신도, 내 가족이나 친지도 불법수사로 구금되거나 처벌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김학의 전 차관도 적법절차의 예외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공익신고자의 주장이다.

공익신고자는 불법 출국금지의 범행동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도 내비쳤다. “교수 출신 장관, 인권변호사 출신 출입국 본부장, 파견 검사가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 (이규원 검사) 혼자 한 일일까? 법무부는 왜 문제 있는 긴급 출금을 승인하였을까? 수 없는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입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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