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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집에 못 돌아온 아들·동생, 지금도 계속 죽어나간다"

중앙일보

입력

영하의 날씨, 텐트 사이로 들어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새해를 맞은 이들이 있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가족을 둔 산재 피해 가족이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본관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다. 중대재해법은 사업장에서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고 이한빛 PD의 부친 이용관씨가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장에서 국회 법사위 잠정합의안에 대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고 이한빛 PD의 부친 이용관씨가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장에서 국회 법사위 잠정합의안에 대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경영계는 중대재해법이 기업에 과도한 책임을 요구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계와 산재 유족은 유예 조항이 마련되고 처벌 수위가 낮아져 반쪽짜리 법안이 됐다고 반발했다. 이들은 왜 한겨울 국회 앞에서 단식하며 법 제정을 촉구했을까. 농성에 참여한 산재 피해 유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재 사고 가벼운 벌금형 그쳐" 

김미숙(51)씨는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씨의 엄마다. 김씨는 지난 8일까지 25일 넘게 단식을 이어갔다. 물과 효소만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8일은 김씨의 생일이었다. 함께 단식한 산재피해 유족 김도현(31)씨가 미역국을 끓여 김씨를 찾았다. 단식 이후 회복하느라 김씨는 죽과 미역국 국물 이외 다른 음식은 먹지 못했다. 생일이면 손편지를 써주던 아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세상 모든 엄마처럼 "용균이가 곧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김씨는 "사고 났을 때 제일 힘든 건 유족인데 유족이 현장에서 무엇이 잘못이고 증거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경찰이나 검찰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일들을 자식을 잃은 부모나 가족이 회사와 싸우며 일일이 밝혀야만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고(故)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해단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고(故)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해단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아들의 죽음 이후 산업재해 피해가족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김씨는 "사고가 나면 가벼운 벌금형에 그치고 말단 관리자만 처벌을 받는 부당함을 알리고 싸워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김씨는 농성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났을 때를 꼽았다.

"그동안 여당이 한 것처럼 중대재해법도 통과시키면 되는 건데 이 법은 왜 꼭 야당이 필요하냐고 제가 물었을 당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여야가 토론으로 입장을 좁혀야 하는데 서로 미루고 넘기다 대충 통과시켰다고 봐요. 헌법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평범했던 엄마는 아들의 죽음 이후 일터에 있는 다른 아들·딸을 위해 살고 있었다.

고 김용균 노동자와 김미숙씨. 사진 김미숙씨 제공

고 김용균 노동자와 김미숙씨. 사진 김미숙씨 제공

"카페 계약서 쓰던 날 동생 사망" 

김도현씨는 2019년 4월 경기 수원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동생 태규씨를 잃었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태규씨는 화물용 승강기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일용직이라는 이유로 안전화와 안전모는 받지 못하고, 운동화를 신고 일했다. 안전교육도 없었다. 김씨는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수원에서 카페 운영을 위해 계약서를 쓰는 날이었어요. 5월 1일 가게를 열려고 컨셉도 잡고 이것저것 알아보던 때였어요. 동생이 사고를 당한 뒤 무산됐어요."

김씨는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살만한 나라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했다. 동생이 죽기 전까지 그렇게 돈을 모아 카페를 차리고, 장사하며 해외여행도 다닌다는 꿈을 꿨다.

"동생이 죽고 난 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에요. 산재 유족들과 '다시는'이라는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그 전까지 이런 현실을 너무 모르고 살아서 미안했어요. 무엇보다 누군가의 가족인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달라고 하는 걸 떼쓰는 사람으로 몰아간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생일을 맞은 김도현씨. 가장 우측이 고 김태규씨. 사진 김도현씨 제공.

생일을 맞은 김도현씨. 가장 우측이 고 김태규씨. 사진 김도현씨 제공.

김씨는 "국회에서 농성하며 의원들을 한명씩 잡아 호소하고 읍소하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은) 여전히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고 죄를 피할 수 있는 법이에요. 매년 2000명이 넘게 산재로 사망하고 있어요. 더는 단식이 아니라 유튜브 등을 통해 어떻게 노력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사업주 진정성 있는 사과 없어" 

김선양(52)씨는 지난해 5월 아들 재순씨를 잃었다. 아들은 광주 조선우드 공장의 파쇄기에 올라가 폐기물을 제거하다 미끄러지면서 기계에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2인 1조' 작업은 지켜지지 않았고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작업장이었다. 검찰은 사업주를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겼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는 아직 없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 자동차 부품 협력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김씨는 아들의 사망에 대처하기 위해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싸우다 보니 아직 새로운 일을 구하지 못했다. 생계가 걱정이라 매일 아침 신문과 온라인의 구인광고를 들여다본다고 한다. 김씨는 "사업주들은 '우리가 시킨 게 아니다. 자기들이 거기 들어가서 위험한 일을 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답답하다. 안전조치를 다 하지 않으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아들의 영정 사진 옆에 서 있는 김선양씨. 사진 김선양씨 제공

아들의 영정 사진 옆에 서 있는 김선양씨. 사진 김선양씨 제공

법 통과 이후에도 이어지는 산재 사고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이후인 지난 10일과 11일에도 노동자들이 기계에 껴 연이어 사망했다. 고용노동부는 21일 지난해 산재 사고로 88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지난해보다 27명이 늘었다. 질병 산재를 포함할 경우 사망자 숫자는 두 배가 넘는다.

김훈 작가는 한 칼럼에서 "지식인·분석가·활동가들이 TV에 나와서 이 문제로 특집좌담을 하는 동안에도, 국회에서 권력의 지분을 놓고 악다구니를 하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은 고층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고 있다"고 꼬집었다. 2021년에도 노동자들은, 산재 피해 유족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원한다.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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