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떨며 서있는 청년, 화가와 함께 눈앞에 있는 듯

중앙선데이

입력 2021.01.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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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호 27면

미학 산책

마사초는 1401년 산죠반니 발다르노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일하다가 1428년에 세상을 떠났다. 발다르노는 피렌체에서 50㎞쯤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그는 흔히 초기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초기 르네상스 회화 선구자 마사초
‘수련자 세례’ 현장에 있다는 메시지
감정이입 된 화가의 현존 느껴져

‘낙원 추방’도 장식 없이 사실대로
쫓겨난 자의 비탄·절망 직설 묘사

원래 브란카치 예배당의 건축은 피에트로 브란카치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상속자이자 조카인 펠리체 브란카치가 그 일을 이어받게 됐다. 그는 견직물을 팔았던 상인이었고, 이집트 카이로의 피렌체 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 프레스코화는 브란카치 가문의 명망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림의 소재도 삼촌 ‘피에트로’의 이름을 따라 성 ‘베드로’의 삶이 된 것이다.

‘낙원 추방’ 거칠고 가차 없는 감정 표현

15세기 초기 르네상스회 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사초의 ‘수련자 세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예배당]

15세기 초기 르네상스회 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사초의 ‘수련자 세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예배당]

하지만 브란카치 예배당의 재건작업은 펠리체 브란카치가 강력했던 메디치 가문에 대한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중단된다. 그는 피렌체공화국의 반역자로 선고받았고, 베드로 순교를 그린 프레스코화도 뜯기게 됐다. 그 후 작업은 50년이 지난 1480년께 재개됐다. 브란카치 예배당의 대부분 그림이 마솔리노와 마사초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리피에 의해 완성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프레스코 연작에서 인물들은 개인적 특성을 드러내고, 공간은 원근법적 구성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이 그림들은 중세적 회화의 상징적 전통과 과감하게 작별하면서 초기 르네상스 걸작이 망라된 사이클로 간주된다.

이 예배당의 여러 작품 가운데 내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낙원 추방’(1424~28)이다. 이 그림은 마사초가 1428년 로마로 감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았고, 리피가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얼개는 마사초가 그렸다. 왼편에 걸린 ‘낙원 추방’은 오른편에 마주한 마솔리노의 ‘원죄’와 짝을 이룬다. 마솔리노가 금지된 과일을 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를 우아하고 날씬하게 그렸다면, 마사초의 그림에서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 준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대상이 상징적이고 양식적으로 묘사된다면, 마솔리노의 그림은 이전 양식보다 좀 더 자연스러운 몸짓과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마사초의 표현은 훨씬 직설적이고 사실적이다. 감정의 표현이 적극적인 것이다. 표현의 이 같은 직접성은 어떤 면에서 ‘거칠다’고 할 만큼 가차 없다. 미술사가 바사리가 마사초 그림의 특징으로 ‘장식 없음’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직하면 장식은 멀어진다.

‘낙원 추방’에서 아담이 고개를 숙인 채 비탄에 잠겨 있다면, 이브는 그 옆에서 울부짖는다. 아담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반면, 이브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아담은 아랫도리를 드러내지만, 이브는 왼손으로 아래를 감추고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가린다. 이 원래 모습이 ‘보기에 안 좋다’고 해서 나중에 나뭇잎으로 가려졌다. 무엇이 안 좋다는 말인가?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안 좋은’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장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이 사실에의 직시다. 사실 직시의 힘은 용기에서 온다. 바로 이 때문에 덧칠된 나뭇잎은 1990년 복구작업 때 비로소 원래대로 제거됐다.

비탄에 찬 두 사람 위로는 붉은 옷을 입은 천사가 떠 있다. 천사는 위협하듯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고, 왼손가락으로는 앞을 가리킨다. 아담과 이브가 나가야 할 입구를 알리는 것이다. 낙원으로부터의 인간 추방은 이렇게 이뤄진다. 이제 인간은 진리와 순수의 ‘문밖에서’ 서성인다. 그는 선악과를 먹은 죄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쫓겨난 두 사람 뒤로는 검은 광선이 핏줄기처럼 쏟아진다. 낙원 밖의 삶은 어둠과 방황, 죄와 불순함이 뒤섞인 길이다. 이 착잡한 미로를 인간은 이제 홀로 걸어가야 한다.

인간의 순수함과 이 순수함의 파괴, 금지된 인식과 이 인식에의 욕망에 따름으로써 일어난 원죄, 이 원죄로서의 타락 그리고 이어지는 낙원 추방…. 아담과 이브는 땅 위에 서 있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몸은 그늘이고 어둠인 것인가? 그렇듯이 인식의 욕구는 언제나 타락을 동반하는가? 갈망과 추방, 죄악과 고통, 욕망과 수치, 이 사이에서 인간은 일평생 수모를 겪는다.

이 낙원 추방의 서사에는 사실 인간의 삶과 그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이 압축돼 있다. 인류의 운명은, 적어도 서구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역사적 경로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마사초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과 한계를 성경 서사에 따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인물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 풍부한 감정의 확고한 표현은 1400년대에 이르기까지 회화 분야에서는 전혀 새로운 사건이었다. 27세의 생애에도 그가 미술의 기나긴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의 하나로 평가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수련자 세례’도 흥미롭다. 이 그림은 세례자로서의 성 베드로를 보여 준다. 그는 오른손에 든 바가지로 한 수련자에게 물을 붓고 있다. 세례받는 청년의 이 모습을 보라! 그는 무릎 꿇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그의 얼굴과 머릿결, 가슴과 어깻죽지, 겨드랑이와 배에서 드러나는 몸의 뚜렷한 윤곽과 음영을 따라가 보자. 그의 상체는 조각상처럼 조형감 있게 빚어져 있다. 그런데 베드로의 옷차림은 평범하다. 그는 신발도 신고 있지 않고, 휘광에 둘러싸인 신성한 분위기를 띠지 않는다.

이 두 인물만큼이나 내게 흥미로운 사람은 수련자 뒤에 선 청년의 모습이다. 그는 벌거벗은 몸에 속옷 하나만 걸친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움츠린 모습이다. 얼마나 사실적인가? 우리는 축복을 받는 순간에도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은총을 앞둔 시간에도 몸의 허기와 현실의 냉기가 없을 순 없다. 나는 마사초의 현존을 느낀다.

마사초의 현존이란 화가가 그리는 인물과 동작과 분위기 속에 내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뜻하고, 이 생생한 나의 감정에서 화가의 존재가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 그림을 보는 우리 눈앞에 바로 그림 속 인물이 있고, 이 인물과 우리가 만나 인사하고 악수하며 말을 건넬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그 현장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인물처럼 이 인물들을 그린 화가도 여기에 함께 자리한다. 추위에 떠는 청년의 몸짓 앞에서 화가는 그의 숨결로, 그의 감정과 사고와 세계관으로 우리와 함께 있음을 나는 느낀다. 축복은 수련자의 머리에서는 물방울처럼 떨어지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두려움과 초조함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수련자 세례’ 다친 자 돌보는 마음 전해져

동양의 전통유학에서 군주의 첫째 덕목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安人)’ 일이었다. 그래서 왕은 무릇 백성을 ‘갓난아이 돌보듯이(如保赤子)’,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보아야(視民如傷)’ 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성의 윤리학도 그런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철학의 시작이란 ‘존재’나 ‘코기토(인식)’가 아니라,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 있고, 이 관계의 윤리성이야말로 제1 철학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림은 공감을 통해 이 윤리를 실천한다. 뛰어난 그림이란 ‘현존의 근접감’ - 바로 눈앞에 있다는 느낌을 야기한다. 이 현존의 느낌 속에서 우리는 그림 속 인물에 공감하고, 이 공감을 통해 화가의 현존을 느끼면서 그림 속의 사건에 참여한다.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이 관계의 어떤 윤리적 가능성은 이 공감적 참여에서 생겨난다.

나는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에 나오는 두 병자의 모습에서 마사초의 개입 -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화가의 윤리를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수련자 세례’에 나오는 추위에 떨고 서 있는 청년의 모습에서도 화가의 돌보는 마음은 있다. 지금 여기 삶의 의미는 여기에 없는 사람을 헤아림으로써 얻어질 것이고, 지금 고향에 있는 자는 고향을 잃어버린 자 - 살아갈 거처와 나라를 잃은 자를 돌아볼 때, 윤리적으로 정당해질 것이다.

문광훈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수영론, 김우창론, 페터 바이스론, 발터 벤야민론 등 한국문학과 독일문학, 예술과 미학과 문화에 대해 20권 정도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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