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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t 함선 60척씩 몰던 中, 왜 갑자기 바다 문 걸어 잠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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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공원 [중앙포토]

정화공원 [중앙포토]

15세기만 해도 바다의 패권은 중국에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 시대 환관 정화는 사상 최대의 선단을 지휘하며 동남아시아는 물론 인도, 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당시 이들이 사용한 은화가 아직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시만 해도 유럽의 항해능력은 지중해를 벗어나지 못했고, 조선 능력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 정화 원정대의 인력은 평균 2만7000여명. 적재중량 2500t 규모의 함선이 60척씩 동원됐다. 100년 뒤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200t 규모의 배 3척에 120명이 탑승했다는 것을 비교해보면 당시 중국의 앞선 기술을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중국은 갑자기 바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1세기가량 지나 그 바닷길을 통해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에 진출했다. 세계사의 흐름은 여기서 분기점을 맞게 된다.

그래서 주경철 서울대 교수는 저서 『문명과 바다』에서 "중국이 힘을 앞세워 인도양 세계를 휩쓸고 다닌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렇게 강대한 해양력을 보유했던 중국이 갑자기 해상 진출을 포기하고 자신의 내륙 지방으로 후퇴하고는 문을 닫아걸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은 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할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는데 마치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났다가 급작스럽게 스러지듯이 갑자기 스스로 물러났다"며 "미스터리"라고 표현했다.

15세기 명나라 탐험선을 복원한 ‘정화(鄭和)’호.[중앙포토]

15세기 명나라 탐험선을 복원한 ‘정화(鄭和)’호.[중앙포토]

이 '미스터리'에 대한 힌트를 찾아보는 자리가 21일 마련됐다. 고려대 역사교육과와 동아시아 인문교육연구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운하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진출을 주저했는가'라는 제목의 세미나에서다.

중국이 바다를 포기하고 이 자리에 서양이 진출한 것과 관련해 학자들이 제기한 가설은 크게 두 가지다.

①유럽의 포화와 중국의 안정: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등에 밀려 지중해와 유럽에서 경쟁하기 어려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양으로 나갔다. 반면 중국은 바다로 나갈만큼 절박하지 않았다.

②북방의 위협: 몽골족의 위협이 여전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국력을 북쪽 국경지대로 집중했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진 조영헌 교수]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진 조영헌 교수]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결핍'을 들었다. "유럽은 대륙 안에서 여러 국가로 쪼개져 서로 경쟁하고 전쟁을 벌이다 보니 자본과 자원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은 대륙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내고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대부분 구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1792년 영국 조지 3세가 파견한 사절단과 청나라 황제 건륭제와의 만남도 예로 들었다. 당시 사절단을 이끈 조지 매카트니는 유럽의 물건을 전달하며 통상을 요청했지만, 건륭제는 "우리는 너희 나라의 물건이 조금도 필요치 않다"고 일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 교수는 기존 가설에 '대운하'를 중요한 변수로 추가했다. 중국이 유럽만큼 바다로 나가야 할 정도의 결핍을 느끼지 않은 것은 대운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운하는 물자가 풍부한 강남과 정치 중심지인 베이징 일대를 잇는 수로다. 5호 16국 시대 양쯔강 일대에 비약적인 개발이 실시되면서 물자 생산력이 장안, 낙양, 북경 등 그때까지 중국 역사의 중심지를 압도했다. 수 양제는 이런 강남의 물자를 강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을 들여 운하를 건설했다. 비록 무리한 토목공사라는 비난으로 수나라가 무너지는 요인이 됐지만 이후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세기 무렵의 중국의 대운하 시설을 보여주는 중국화 [ 글항아리 제공 ]

15세기 무렵의 중국의 대운하 시설을 보여주는 중국화 [ 글항아리 제공 ]

조 교수는 "대운하라는 물류 시스템으로 강남으로 모이는 어마어마한 물적 자본을 북경(베이징)으로 원하는 곳으로 보냈다. 운하와 연결된 중국의 순환구조는 유럽 각국의 유통 규모를 합친 것보다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럽 세계의 '지중해'에 비교했다. 그는 "유럽 세계가 지중해를 통해 서로 연결했다면 중국은 수많은 하천이 있고, 이를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가 있었다. 즉, 운하가 내륙의 지중해와 같은 역할을 했고 하나의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갈 필요성이 적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그때까지 해신(海神)으로 받들던 마조(媽祖)가 하신(河神)으로 바뀌는 신앙의 변천과정도 일어난다. 조 교수는 바다 대신 운하로 국가의 자원을 움직인 이 시기를 '대운하시대'로 명명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와 대비시킨 단어다.

중국 우성역 역참 인근 대운하. [중앙포토]

중국 우성역 역참 인근 대운하. [중앙포토]

그 외에 바다를 막은 데는 기독교 등 황제의 권력으로 통제되지 않는 세력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조 교수는 "명나라 때부터 서양 선교사들의 진출이 본격화됐는데 기독교 세계에선 신 앞에서는 국가권력도 절대적이지 않다. 중국 입장에선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이라고 해서 '결핍'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예를 들어 당시 국제 기축통화였던 은이나 동전을 만들 때 사용하는 은과 구리 같은 광석은 공급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 항구를 통한 제한적 무역은 가능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주변은 정적이고 단절되고 폐쇄된 곳이 아니다. 물자와 인력과 정보가 끊임없이 교류하던 곳"이라고 덧붙였다. 조 교수의 '대운하시대'에 대한 설명은 조만간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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