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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갈 수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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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췌장에 걸린 암이 간으로 번졌을 때의 스티브 잡스 얘기다. 간이식을 위해 2009년 1월 캘리포니아주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부자든, 권력자든 합법적인 방법으로 ‘새치기’하는 건 불가능한 게 미국이다. 모든 기증은 공식 웹사이트에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고, 누구든지 수시로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잡스는 대략 6개월쯤 기다려야 했는데 의사들은 그의 간이 4월엔 기능을 멈출 거라고 했다.

정의·법집행 책임진 법무장관에 #‘반칙 장관’ 연달아 임명하면서 #반칙 없는 세상은 어떻게 만드나

다른 주에 이름을 올리는 게 유일한 우회로였다. 동시에 2개 주까지 등록하는 건 법상 허용되는데 그러자면 조건이 붙었다. 8시간 안에 지정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하고, 해당 주 의사들이 허락해야 한다. 잡스의 전용기가 조건을 충족시켰지만 아슬아슬했다. 2009년 3월 21일 20대 청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장기를 기증받을 수 있었다. 잡스는 “하마터면 그때 죽을 뻔했다”고 나중에 자서전에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들고나온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는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부자들의 전용기 특혜를 문제 삼아 절망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특권층 반칙만 없다면 견딜 만하다. 문 대통령은 자괴감과 열패감이 없는 나라를 약속했다. 지금 그런가? 몇 사람은 그렇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선 3연속 ‘반칙 장관’으로 이어 달린 법무부 장관들이 있다. 만신창이가 된 조국·추미애 장관에 이어 인사청문회를 앞둔 박범계 장관 후보자가 각종 위법 논란에 휩싸이더니 청문회 자체가 파행 쪽으로 가는 모양이다. 후보자는 야당의 자료 제출을, 여당은 증인 채택을 대부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럼 다음 주 초 청문회는 하나 마나인데 분명한 건 결과와 관계없이 대통령이 그를 임명할 거란 사실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전임자도, 전전임자도 그랬다. 이분들은 ‘끼리끼리’ 정의로운 나라라고 믿을 것이다. 정의를 지키는 법무부 장관직에 충실했다고 하니까.

물론 대통령 측근 위주의 ‘코드 인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정권은 없었다. 그래도 검증에서 걸리면 대개는 물러섰다. 그런데 유독 이 정부에선 임명되는 장관마다 불법·탈법 시비가 끊이질 않는데도 습관적으로 모르쇠다. 야당이 반대하든, 말든 임명 강행된 장관급 인사가 30명에 가깝다. 나라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정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당한 건 그런 말을 자기들만의 술자리에서도 아니고 대놓고 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주인에게 덤비지 말라’고 겁줬다.

2016년 최순실씨 딸의 부정입학은 최씨가 기소되기도 전에 대학이 입학을 취소했다. 하지만 조국 전 장관 딸은 대학 측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주인을 알아본 셈이다. 그래서 주인 딸은 법원도 부정을 확인한 가짜 스펙으로 의사 자격을 땄다. 추미애 장관 아들의 군 특혜 의혹이 터져나올 때 당직사병 실명을 공개하며 추 장관을 엄호했던 분은 아무런 인연도, 경력도 없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에 올랐다. 전체 공공기관장의 3분의 1 정도가 ‘캠코더 인사’라고 한다. 감사 등을 포함하면 4배에 달한다.

이런 주인들이 만드는 ‘정의로운 나라’에선 즉흥적으로 탈원전하고, 제멋대로 빚을 내 제멋대로 신공항을 세우고, 세금 들여 만든 4대강 보(洑)를 세금 들여 부순다. 이걸 감사하려는 감사원에겐 ‘주인 행세한다’고 꾸짖는다. 나라 주인이 따로 있다는데 그냥 백성들이 ‘나라가 네 것이냐’고 묻는 건 딱하고 서로 쑥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또 묻게 된다. 주인이 다짐했던,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는 결국 희망고문이었다는 것인지. 주인들의 반칙 없는 세상은 미국 같은 데서나 가능한 ‘갈 수 없는 나라’의 다른 말이었다는 뜻인지.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