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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피해자 부모까지 "울고싶어도···" 진영논리가 앞선 박원순 사건

중앙일보

입력

가슴이 답답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지만 나는 우리 딸 앞에서 절대로 내색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같이 죽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녀가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오면 유심히 들여다 보며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연구하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모를 것입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의혹 피해자 A씨 어머니 입장문 중)

피해자 외면한 ‘진영논리’에 A씨의 부모까지 입장문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해 7월13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해 7월13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성추행 피해자의 어머니와 아버지, 남동생까지 나서야 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사건 얘기다. 피해자 A씨를 대리하는 서울시장 위력성폭력사건 공동변호인단은 지난 18일 “지난 6개월간 무수히 자행되어 온 2차 피해와 피해·피해자를 부정하는 고위층 입장에 대해 가족들의 심경을 밝히기로 했다”며 입장문을 공개했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문에는 친여(親與) 인사들의 ‘진영논리’와 책임 회피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떠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옳고, 다른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배척하는 것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 전 시장에게 성추행 피소 예정을 암시하도록 조력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30년 여성운동가 ‘남윤인순’, 정치인 ‘남인순’에 굴복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지난 2018년 당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대책TF 위원장(가운데)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 전 지사에 대한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있다. [사진 더불어민주당]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지난 2018년 당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대책TF 위원장(가운데)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 전 지사에 대한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있다. [사진 더불어민주당]

남 의원은 지난 19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2010년 상임대표 임기를 마칠 때까지 16년을 여성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호주제 폐지, 성매매방지법 제정, 영유아보육법 개정 등에 앞장섰다. 2012년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성하기 전까진 호주제의 불평등함을 알리기 위해 ‘남윤인순’이라는 이름을 썼다.

자기 진영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치 않았다. 지난 2018년 3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 당시에는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사실을 접하고 같은 당 의원으로서 참담함을 넘어서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안 지사가 ‘어리석은 행동에 용서를 구한다’고 입장을 밝혔는데,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명확한 범죄”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피해호소인 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있다. [뉴스1]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있다. [뉴스1]

하지만 박 전 시장 사건에선 남 의원의 강단이 진영논리 앞에 무너졌다. 남 의원은 A씨가 성추행 혐의로 박 전 시장을 고소하기도 전에 이를 암시하도록 임순영 전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알렸다. 이후에는 “피소 사실을 유출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얘기가 도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만 봤다”는 해명도 신빙성 없게 들린다.

A씨를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에 따르면 박 전 시장 사건을 처음 인지했던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미 A씨의 고소 예정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를 거쳐 남 의원에게 관련 내용이 전달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박 전 시장의 피소 예정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단어 사용에도 남 의원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튜브선 꽃뱀론, 정치권에선 무죄론

친여 유튜브 채널인 열린공감TV 측이 제보받아 공개한 피해자 A씨의 서울시청 재직 당시 사진. 당시 A씨가 박 전 시장의 손을 접촉한 것을 두고 이들은 "누가 누구를 성추행 한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친여 유튜브 채널인 열린공감TV 측이 제보받아 공개한 피해자 A씨의 서울시청 재직 당시 사진. 당시 A씨가 박 전 시장의 손을 접촉한 것을 두고 이들은 "누가 누구를 성추행 한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진영논리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박 전 시장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난해 7월13일 서울시청 앞에선 “저쪽(보수 진영)의 흠결은 10개, 100개, 1000개가 있는데 우리(진보 진영)는 흠결이 하나만 있어도 안 되는 것이냐”는 한 지지자의 울음이 광장에 퍼졌다. 친여 유튜브 채널에 뿌려진 피해자 A씨 관련 동영상에선 ‘무고로 살인한 살인자’ ‘꽃뱀론’ 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치권에선 ‘무죄론’이 나왔다. 경찰이 박 전 시장 사건 수사를 불기소 의견으로 마무리하자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필귀정”이라고 평했다. “무고 등 법적 조치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을 뿐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그는 박 전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오성규 전 비서실장도 이날 “박 전 시장의 성추행에 대한 고소는 거짓 고소”라고 보란 듯이 말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해 7월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고인의 운구차량이 도착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해 7월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고인의 운구차량이 도착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박 전 시장 사건이 불기소된 건 그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공소권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박 전 시장의 조문 행렬에 있던 한 시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청년임대주택, 반값 등록금 등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온 박 전 시장을 존경한다”면서도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공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은 정치권과 지지세력의 과도한 피해자 공격으로 잊히고 있다. 지난1988년 박 전 시장이 창립 회원이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박 전 시장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최초로 대리한 변호사였다”며 “박 전 시장의 명예가 박 전 시장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피해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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