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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도 직원 1명 안 잘랐다,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1926~2021.1.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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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수 대한상의 회장을 지낸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이 20일 별세했다. 중앙포토

최장수 대한상의 회장을 지낸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이 20일 별세했다. 중앙포토

최장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며 삼양그룹을 이끌어온 김상하 명예회장이 1월 20일 별세했다. 95세. 고인은 삼양그룹 창업주인 김연수(1896~1979) 선생의 7남6녀 중 5남으로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49년 졸업하고 삼양사에 입사했다. 입사 후 형인 김상홍 명예회장(1923~2010)과 함께 삼양을 이끌었다.

72년간 경영 현장을 지킨 고인의 경영 철학은 2015년 발행한 회고록『묵묵히 걸어온 길』에 잘 드러나 있다.

“사업이란 제조업을 통해 산업보국을 실현해야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영속성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가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으며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고인은 52년 삼양의 제당 사업 진출을 위해 일본 주재원으로 파견돼 제당 사업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확보했다. 귀국 후 울산 공장 건설 현장의 군용 양철 슬레이트로 지은 간이 숙소에서 현장 근로자와 함께 생활했다. 이후 폴리에스터 섬유 원료인 TPA,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전분·전분당 사업에도 나섰고, 패키징과 의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해 미래 성장 동력도 준비했다.

그는 또 90년대 국내 화학섬유업계가 신설과 증설에 나설 때 사업의 한계를 예상해 사업 확대를 중단했다. 심지어 신사업으로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폴리에스터 필름 사업마저 철수했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추진하던 임원에게 기업 환경이 일시적으로 나빠졌다고 직원들을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며 인원 감축을 백지화하기도 했다. 고인은 당시 “회사에서 나의 책임이 가장 크기 때문에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현장을 중시했다. 제조업의 근간은 “품질 좋은 물건을 생산해 적기에 공급한다”라는 게 지론이었다. 그래서 매달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며 “현장 직원들이 삼양의 삶을 책임진다”고 격려했다. 특히 경영 환경이 어려운 사업장을 우선 방문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콩나물 시루를 돌보는 기질’이라 평가했다. 웃자란 콩나물은 누르고, 덜 자란 콩나물에는 물 한 방울이라도 더 준다는 것이다. 사업장을 돌아본 뒤 가능한 많은 직원과 식사를 하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왼쪽)이 1996년 상의 주최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왼쪽)이 1996년 상의 주최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는 88년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해 12년간 재임했다. 대한상의 역사상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돼 있다. 대한농구협회장도 85년부터 12년간 맡았다. 한국 농구는 농구대잔치의 흥행과 프로 농구 출범 등으로 중흥기를 맞았다. 그는 또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한일경제협회장, 환경보전협회장을 비롯해 100여 개 단체의 수장을 맡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75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2003년)을 수상했다.

고인은 경영에 매진하는 한편 2010년 양영재단·수당재단·하서학술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인재 육성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투병 전까지 종로구 연지동의 그룹 본사로 출근해 재단 활동을 직접 챙기며 장학 사업과 학문 발전에 애정을 쏟았다. 유족으로는 아내 박상례 여사와 아들 김원 삼양사 부회장, 김정 삼양패키징 부회장 등 2남이 있다.

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 출생년도1926
  • 직업[現]기업인,[現]경제기관단체인
  • 소속기관 [現] 삼양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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