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MB정부는 신종플루를 어떻게 이겨냈나?

중앙일보

입력 2021.01.20 15:30

■ 백신은 없고 치료제는 전 국민 5% 분량만 갖춘 상태로 사망자 없이 100일 버텨내

■ ‘제2의 광우병 사태’ 차단 위해 질본 등 전문가 의견 시종일관 중시한 정책 책임자

■ 이명박 대통령의 2500억원 투입 결단으로 타미플루 대량 구입한 것이 ‘게임 체인저’

■ 약을 많이 사도, 적게 사도, 비싸게 사도 문책당해… 실무자 ‘면책 특권’ 아직 요원

2009년 10월 28일 이명박 대통령(맨 왼쪽)이 신종플루와 전쟁 중인 국립의료원을 방문해 전재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맨 오른쪽)의 보고를 듣고 있다.

2009년 10월 28일 이명박 대통령(맨 왼쪽)이 신종플루와 전쟁 중인 국립의료원을 방문해 전재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맨 오른쪽)의 보고를 듣고 있다.

"우리 당은 △△△△ 발생 초기부터 수차례에 걸쳐 우려와 정부의 적절한 대응에 대해 촉구한 바 있다. 초기 감염경로 차단과 그 후 지역사회 감염에 대한 대책 수립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것도 해외에서 직접 감염된 사례가 아닌, 지역사회 감염이라는 2차 감염이 원인이 됐다. 이는 정부의 대응 방식에 구멍이 생겼다는 반증이다. 최근 지역사회 감염 사례는 심각한 수준으로 확산 일로에 있다. (…) 국민에게는 일종의 공포증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정부의 허술한 초기 대응과 이후 확산 과정에 대한 확실한 대책 미흡이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 이런 추세라면 가을과 겨울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 이에 대비한 백신 확보와 예방 정책에 더욱 힘써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K방역,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아냐… 메르스·신종플루가 선생님”

2020년, 야당인 국민의힘이 낸 논평이 아니다. ‘△△△△’ 자리에 들어가는 정답은 ‘코로나19’가 아니라 ‘신종플루’였다. 이 브리핑을 읽은 당사자는 2009년 8월의 노영민 민주당 의원(이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이다. 당시 그는 민주당 대변인 신분이었다. 노 전 비서실장과 민주당은 약 12년 전, 당시 집권당을 향해 겨눴던 칼날을 이제 자신들한테도 들이밀어야 하는 ‘공정한’ 상황에 처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 1년 이상 국민은 적잖은 자유를 국가에 헌납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마스크를 썼고, 거리두기를 했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방역·백신·치료제 세 박자를 모두 갖춘 코로나 극복 모범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문 대통령이 다짐한 날(1월 5일), 코로나 사망자 수 1000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이 전염병 탓에 이렇게 몸살을 앓았던 적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MB) 정부 때의 신종플루, 박근혜 정부 때의 메르스가 그랬다. 이 가운데 2009년을 할퀸(사망자 263명 추산) 신종플루 당시 MB 정부의 대응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공한 방역’이라는 재평가를 얻고 있다. 2009년 4월 멕시코에서 첫 발병 사례가 확인된 신종플루를 그해 11월, 비교적 신속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물론 매뉴얼이 부재한 탓에 그때도 미흡한 점은 있었다. 신종플루에 비해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기 훨씬 어려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도 없다. 게다가 신종플루보다 코로나19의 전염력이 더 강력하고, 노년층에 매우 위협적이다. 그러나 정치적 지형과 무관하게 그때의 방역 노하우가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MB 정부의 신종플루 대응 골든타임은 언제였으며, 무엇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지, 당시 방역과 행정 최전선에서 뛰었던 전병율 차의과학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교수(당시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복원했다.

신종플루라는 질병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진 시점은 2009년 4월 말경이었다. 전 교수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걸려 온 전화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WHO의 필리핀 마닐라 오피스에서 연락이 왔다. ‘멕시코와 미국 접경지역에서 원인불명의 호흡기 질환이 유행하고 사망자가 나왔다. 어쩌면 스페인독감 이후 새로운 형태의 인플루엔자일 수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급보를 접한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는 지체 없이 보건복지부, 청와대, 총리실에 보고했다.

신종플루 1호 환자를 찾아내다

당시 총리실 보고 라인은 박영준 국무차장이 총괄하고 있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MB 정부의 최고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그를 비롯한 MB 정부 인사들에게는 2008년 겪었던 ‘광우병 파동’ 트라우마가 있었다. 신종플루가 제2의 광우병 사태를 불러오는 상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광우병은 괴담에 의한 선동이었지만, 신종플루는 실체가 있었다.

박 차장은 “정부 차원에서 어떤 대응 체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신속하겠는가?”라고 질본 측에 물었다. 전문가의 의견에 최대한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당시 질본 센터장이었던 전 교수는 “신종 전염병 유행 조짐에 대해 정부가 즉각적으로 대응한다는 모습을 국민에게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실제 그 바로 다음 날 국무차장 주재로 보건복지부, 외교부, 국방부, 교육부 등의 차관들이 소집된 회의가 열렸다.

이후 방역 역량을 검역에 집중했다. 외부에서 생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니까 어떻게든 국내로 들어오지 않도록 차단할 수만 있다면, 국내 전염은 이론적으로 없을 터였다. 가장 신경을 기울인 곳은 당연히 공항이었다. 입국자 대상으로 발열 검사를 했다. 신종플루 감염 의심자가 나온 다음 날 대책본부를 차렸다. ‘신종플루 1호 환자’는 멕시코로 피정을 다녀온 50대 A수녀였다. 그녀는 4월 2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당시 공항에 40대 B수녀와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셋은 경기도의 한 수녀원까지 같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이후 5월 2일 A수녀의 증세가 확인되자 2차 감염 여부에 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결과적으로 A수녀는 ‘슈퍼전파자(다수에게 질병을 퍼뜨리는 사람)’를 모면했다. ‘멕시코에 신종플루가 번지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뒤,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한 A수녀의 자제심 덕분이었다. 전 교수는 “그 수녀님은 자신이 혹시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행동했다. 귀국 비행기 안에서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귀국한 뒤에도 혼자 식사했으며 부득이한 일이 아닌 한,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열이 나자 바로 과천시 보건소에 자신 신고를 했다. 보건소는 바로 질본에 보고를 올렸다. 질본은 환자 몸에 대한 체크를 마친 뒤 음압병동이 갖춰진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겼다. 즉, A수녀의 확진이 확인된 시점에 이미 그녀는 국군수도병원에 격리돼 있었다.

A수녀의 절제와 방역 당국의 기민한 조처로 신종플루의 지역사회 확산을 일단은 막을 수 있었다. 질본은 수녀원의 동의를 얻어 A수녀 케이스를 적극 홍보했다. 전 국민에게 경각심은 심어주되, 대응만 잘하면 막아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약이 없을 때 가장 힘들었다”

신종플루가 창궐할 당시 전병율 질본 전염병대응센터장은 최전선에서 감염 확산을 막아냈다.

신종플루가 창궐할 당시 전병율 질본 전염병대응센터장은 최전선에서 감염 확산을 막아냈다.

이종구 당시 본부장이나 전병율 센터장을 포함한 질병관리본부, 보건복지부, 총리실, 청와대에서는 이때가 가장 조마조마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2차 감염, 즉 신종플루의 전파력이 확인된 탓이었다. 공항에서 A수녀와 차를 같이 탔던 B수녀가 감염됐다는 결과가 입수된 것이다. 신종플루와 싸우는 과정에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느냐는 물음에 전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감염자가 많이 나왔을 때? 그렇지 않다. 약은 없는 상황에서 버텨야 할 때가 가장 막연했다.”

신종플루 최초 사망자는 2009년 8월 15일 나왔다. 그러니까 백신과 치료제 없이도 100일 이상을 사망자 없이 컨트롤한 것이다. 당시 방역 관계자들이 “성공한 방역”이라고 자부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 기간, 신종플루 확진자를 틀어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공항에서 검사를 해도 한계가 있었다. 잠복기를 거치는 무증상 입국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지역사회 감염은 시간문제였다. MB 정부는 이를 받아들인 전제에서 ‘집단감염이 나오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포커스를 맞췄다. 이렇게 대비 태세를 갖춘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담동 어학원 집단감염이 터졌다. 강남 유명 학원에서 방학을 대비해 외국인 강사 60여 명을 대거 채용했다. 강남역 인근 오피스텔에 모아놓고 교육을 시킨 뒤, 이들을 전국 어학원으로 투입할 예정이었다. 여기서 신종플루 감염자가 나타났으니 방역 당국에 초비상이 걸렸다. 게다가 하필 감염자가 확인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뉴스가 터졌다. 전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신종플루가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비극에 맞춰졌다. 국민의 경각심이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어쨌든 방역 당국으로선 강남 한복판에서 확진자가 출현한 상황을 경시할 수 없었다. 2차 감염이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판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에는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한 동선 확보도 불가능했다. 일단은 외국인 강사 전원을 최대한 조속히 격리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로 옮기느냐’였다. 호텔이나 아파트 격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질본에서 내린 결론은 서울시 양재동 인재개발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공무원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전 센터장은 조은희 서울시 정책관(현 서초구청장)에게 요청했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과 전재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까지 보고가 바로 올라갔다. 전 장관이 오 시장에게 강하게 필요성을 설명했고, 오 시장은 이의를 달지 않고 수긍했다. 공무원 교육을 중단하고, 그곳에 확진자와 의심자를 격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생활치료센터(전염병 경증환자를 위한 생활 지원과 치료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도입된 시설)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지방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튀어나왔다. 김태호 당시 경상남도지사(현 무소속 국회의원)가 주최한 국제합창대회가 7월 열렸다. 노래 경연이었으니 침방울이 안 튈 리 없었다. 여기서 감염자가 나타나자 전 세계 수백 명 참가자 전원을 집단 격리해야 했다. 마침 여름방학이 막 시작된 무렵이었다. 마산대와 인제대 기숙사가 비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에 참가자 전원을 격리했다. 누가 감염이고 아닌지 바로 알 길이 없었다. 격리하고 지켜보되 증상이 나타나면 치료제 타미플루를 줬다. 전원이 괜찮은 것으로 확인된 다음에 격리를 풀었다.

코로나19 때에 비해 당시는 통신 기술이 열악했고, 매뉴얼도 미비했다. 반면 타미플루라는 약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지금보다 나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점에 확보된 타미플루의 양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백신은 아예 없었다.

백신과 타미플루 확보 쟁탈전

전남 화순의 녹십자 공장에서 백신 생산이 가능해지자 활로가 열렸다. 신종플루 백신에 유정란이 필요했기에 달걀이 쌓여 있다. / 사진:녹십자

전남 화순의 녹십자 공장에서 백신 생산이 가능해지자 활로가 열렸다. 신종플루 백신에 유정란이 필요했기에 달걀이 쌓여 있다. / 사진:녹십자

MB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타미플루는 전 국민의 5%를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가지고 있었던 배경에는 조류독감이 자리한다. 조류독감의 인체 감염에 대비해 타미플루(조류독감 치료제)를 비축해놨던 것이다. 문제는 ‘전 국민 대비 20% 분량’이라는 질본의 요청이 묵살된 데 있었다. 기재부에서 예산 낭비 우려를 이유로 5% 분량으로 줄인 것이다. 약은 특성상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다. 즉 너무 많이 사도, 너무 적게 사도, 너무 비싸게 사도 실무자는 문책받기 십상이다. 이러니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풍토는 박근혜 정부 때 메르스를 겪은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 펼쳐지고 있다.

초기 물량 확보에 실패해 타미플루와 백신이 다급해질수록 몰리는 쪽은 한국 정부였다. 시간은 글로벌 제약사들 편이었다. 2009년 6월 유럽 선진국들이 인구 100% 분량의 백신을 확보했을 때, 한국은 2.7%였다. 이종구 본부장이 백신 확보를 위해 2009년 8월 벨기에로 출국한 순간, 한국의 협상 레버리지는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한국 정부는 남반구 선진국인 호주에 백신 스와핑까지 제안했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이 반대로 움직이니까 호주가 여름일 때, (겨울인) 한국에 백신을 공급해 달라. 그러면 호주가 겨울일 때, (여름인) 한국이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백신과 치료제를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곧 그 나라의 국격처럼 다뤄졌다.

사면초가 형국에서 방역 담당자들은 ‘투 트랙 전략’을 취했다. 하나는 백신이 안 되면 치료제인 타미플루라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전력했다. 타미플루 1000만 명분을 구입하기 위해선 2500억원이 필요했다. 전재희 장관과 이종구 본부장은 ‘패스트 트랙’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신청했다. 그 자리에서 “이대로 가면 대유행이 올 수 있다”며 설득했고, 결국 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냈다.

신종플루 때는 방역에 정치가 끼어들지 않았다

2009년 12월, 신종플루 방역에 성공한 뒤 MB 정부는 타미플루를 북한에도 제공했다.

2009년 12월, 신종플루 방역에 성공한 뒤 MB 정부는 타미플루를 북한에도 제공했다.

나머지 하나의 고민이 백신이었는데, 뜻밖의 곳에서 풀렸다. 녹십자에서 백신 생산능력을 확보한 것이다. 더는 글로벌 제약사들에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전 센터장은 이를 “천운”이라고 표현했다. “노무현 정부 때 지역균형발 전 차원에서 비수도권에 백신 공장을 짓도록 지원했다. 원래 약속돼 있었던 외국계 제약사는 ‘지방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추가모집을 한 결과 녹십자가 선정됐고 전남 화순에 공장을 지었다. 원래 이 공장은 2012년 완공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부지런한가? 2007년 설계도가 나온 지 불과 1년 반 만인 2009년에 완공해낸 것이다.”

WHO로부터 백신을 만들 수 있는 도면은 얻은 상태였다. 문제는 그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였는데, 녹십자 공장으로 해결된 것이다. 2009년 10월 내 백신 생산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김우주 고려대 교수가 안전성 검사를 했고, 신속승인절차를 밟았다. 이후 ‘아쥬반트’라는 물질을 도입해 4배 양산이 실현됐다.

타미플루와 백신이 모이는 10월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피 말리는 시간과의 싸움이 전개됐다. 질본의 가장 큰 과제는 당장 손에 쥔 대한민국 인구 5% 분량의 타미플루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공급하느냐였다.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타미플루를 얻으려 혈안이었다. 그러나 하나라도 그렇게 유용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질본은 ‘언제, 누구에게 타미플루를 지급했는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의사 처방전이 없으면 절대 주지 않았다.

전병율 교수는 질본 센터장을 역임했던 2009년 10월 26일 “현재의 신종플루 상황이 국가전염병 대응단계를 ‘경계’에서 ‘심각’으로 상향 조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발표했다. 당시 누계 확진자가 5만 명, 하루 확진자가 3000명을 넘는 시점이었지만, 오히려 이때 MB 정부 방역 당국 책임자들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우려했던 것보다 사망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견디면 충분한 약이 확보될 것이며, 그러면 신종플루는 잦아들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 그렇게 됐다. 2009년 10월 말 전 국민 접종이 시작되자 11월 이후 신종플루는 위협감을 상실했다.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낸 요인에 대해 전 교수는 “일단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대단한 분이었다. 전문가가 보고하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예산 확보에서 기재부를 압도했다”며 “그리고 대한의사협회(의협)와 대한병원협회(병협)가 지금처럼 대립하지 않았다. 화상회의가 없었던 시절, 텔레 콘퍼런스를 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당시에도 최고의 공로자는 역학조사관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정보공개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역학조사관은 확진자를 찾아내면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갔었는지 말하도록 설득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들은 24시간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 보건소는 질본과 다이렉트로 연결됐다. 시장, 군수, 구청장 등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를 지휘하는 이 본부장, 전 센터장, 권준욱 과장(현 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 제2본부장) 등은 사무실에 침대를 가져다놓고 퇴근하지 않았다.

MB 정부 신종플루 대응의 또 하나 특징은 전문가들에게 방역 이외에 정치나 경제 요소는 의식하지 않도록 차단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보다 신종플루가 상대적으로 덜 치명적이었고, 타미플루라는 치료제가 어쨌든 존재한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작용한 것이다.

신종플루를 거치면서 전 교수는 “백신이나 치료제 구매에 대해선 면책 특권을 줘야 한다”는 신념을 얻었다. 그러나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를 거쳤는데도 아직까지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면 실무 공무원들의 권한은 제한되고 책임만 생긴다. 결국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 되고, 선제적 구매를 못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정부에게 돌아간다.

전 교수는 K방역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메르스 방역의 아픔을 통해서 정보공개, 동선파악, 시약과 관련된 긴급승인 등을 건진 것이다. 그때의 법령개정 덕을 이번 코로나19 방역이 본 것이다. 메르스가 K방역의 선생님이다.”

코로나19 방역은 신종플루보다 더 어려워

코로나19가 어려운 점은 치료제가 나올 확률이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타미플루라는 항바이러스제가 있었던 신종플루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이다. 예방의학 전문가인 전 교수의 설명이다. “코로나19 관련 치료제는 전부 ‘약물 재창출’이다. 다시 말해 기존에 있는 약을 가지고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말라리아 치료제도 써보고 했지만 현재까지 전부 효과가 없다. 혈장 치료제나 항체 치료제는 제한적으로 효과는 있지만, 위중증 환자들한테는 쓸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 항체 치료제를 2개나 승인했지만 거의 쓸모가 없다. 치료제는 소위 말하는 특효약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치료 물질을 찾아야 하는데 1~2년으로 될 일이 아니다. 설령 그런 물질을 개발해도 1상부터 3상까지, 갈 길이 험하다.”

결국 타미플루 항바이러스제와 녹십자 백신의 양면 공격이 가능했던 신종플루 때와 달리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게임 체인저’는 백신뿐이다. 화이자나 모더나, 존슨앤드존슨, 아스트라제네카 등 글로벌 제약사에서 이토록 재빨리 백신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관건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특효약이며 검증된 백신을 얼마나 많이, 빠르게 손에 쥘 수 있느냐다. 아울러 또 하나의 궁금증은 백신의 효능 기간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코로나19 백신을 계속 맞아야 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1월 11일 신년사에서 “다음 달(2월)이면 백신 접종을 시작할 수 있다”며 “우선순위에 따라 순서대로 전 국민이 무료로 접종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체 백신 개발도 계속 독려하겠다. 백신 자주권을 확보해 국민의 안전과 국제 보건협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한 말의 진정성은 시간이 검증해줄 것이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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