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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우리만 몰랐던 모더나와 파우치의 숨은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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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세균 총리는 백신 도입이 늦어지자 “지난해 7월에 확진자가 적어 백신 의존도 높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질병관리청 공무원들은 “면책 특권이 없어 감사와 징계의 불이익이 두려웠다”는 핑계를 댔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자율권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정확한 지식과 정보 부족이다. 잘 모르니 과감하게 베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미, 전문가 믿고 과감한 백신 도박 #파우치 소장은 mRNA 기술 꿰뚫어 #한국만 담쌓고 ‘국뽕’식 독자 개발 #보수 야당도 백신 정치화는 금물

지난해 7월 24일 미국 증시에서 갑자기 모더나 주가가 10% 급락하고 중소 벤처인 아르부투스의 주가가 120% 튀었다. 미 특허심판원이 지질나노입자(LNP) 특허 소송에서 아르부투스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이는 mRNA 백신에서 불안정한 RNA를 비눗방울처럼 얇은 지방질로 감싸 몸속 세포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는 물질이다. 세포에 도달하면 RNA가 쉽게 나오게 잘 쪼개져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모더나 백신은 그 직후 로열티를 물고 첨단 LNP를 사용한 덕분에 값은 비싸지만 영하 20도에서 보관 가능하다. 반면 자체 LNP 기술을 이용하는 화이자 백신은 값은 싸지만 영하 70도의 콜드체인이 필수다.

미국 정부는 모더나가 궁지에 몰린 그때 mRNA 백신에 과감한 승부수를 띄웠다. 곧바로 7월 말 로열티 등 기술개발 지원금 9억9500만 달러를 쏟아부었고, 8월 13일에는 15억 달러(1조7700억원)를 선불로 주고 1억회 분 백신을 선점했다. 눈치 빠른 이스라엘과 일본도 긴박하게 움직여 모더나에 숟가락을 얹었다. 반면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은 코로나 확진자 40명의 K방역을 자랑하기 바빴다. 백신·치료제 자주 개발의 ‘국뽕’에 매달렸다. 정권 수뇌부는 한동훈 검사장에게 육탄전으로 덤벼든 정진웅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장의 독직폭행 사건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미국에서 이런 승부수를 띄운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연일 “mRNA 백신은 새로운 기술이지만 나는 안전성과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파격적인 지원을 응원했다. 여기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올해 노벨 생리학상 후보로 mRNA 기술의 주역인 드류 와이즈만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와 바이오엔텍의 카탈린 칼리코 수석부사장을 꼽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두 사람은 1997년 펜실베이니아대의 복사기 앞에서 우연히 만나 mRNA 이야기를 나눈 뒤 10년간 공동 연구로 mRNA의 기반을 닦았다. 희한하게도 드류는 그 직전 파우치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에서 파우치 소장의 지도 아래 박사후(포닥) 과정을 밟은 것이다. 당연히 파우치는 초창기부터 모더나와 바이오엔텍의 기술 개발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 있게 mRNA 백신에 베팅한 것이다.

조기진단과 격리라는 K방역은 단기적·소극적 대책일 뿐이다. 근본 해법은 백신밖에 없다. 글로벌 차원에서 백신은 기초연구에 강한 미국과 유럽이 앞서나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국내는 임상 실험할 확진자도 얼마 없다. 일찌감치 일본·프랑스·이스라엘·호주는 실력 차이를 인정하고 독자 개발을 접었다. 미국·유럽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mRNA 백신에 발 빠르게 올라탔다.

돌아보면 선무당이 사람 잡고 반풍수가 집안 망친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 배진건 이노큐어 테라퓨틱스 수석부사장은 “우리는 자신의 백신·치료제 실력을 너무 맹신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정치권이 밀어붙인 독자 개발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국산 백신은 개발 시한을 1년 뒤로 미뤘고, 셀트리온의 항체치료제도 게임 체인저로는 미흡하다는 평가다. 바이러스의 침투 차단·증식 억제·전파 차단의 3가지 기능 중 감염 초기의 침투차단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변이 바이러스에도 취약하다.

하지만 보수 야당도 더 이상 정부 잘못을 이삭 줍듯 비난만 할 게 아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파우치 소장은 여야 정치권에 의해 목이 잘려도 수십번 잘렸을 것이다. 신규 확진자 20만명의 책임을 물어 희생양으로 삼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민주당 바이든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나는 파우치 소장의 연임을 희망한다. 그가 안전하다고 하면 가장 먼저 백신 주사를 맞겠다”고 선언했다. 정권과 진영논리를 떠나 진짜 전문가에게 무한 신뢰를 보낸 것이다.

보수 야당은 백신의 정치화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특히 ‘mRNA백신=선, 다른 백신=악’의 이분법은 금물이다. 가톨릭대 남재환 교수의 이야기는 귀 기울일 만하다. “모더나·화이자·아스트라제네카 모두 임상 결과를 보면 좋은 백신이다. 백신을 맞은 실험자 중 코로나에 걸린 경우가 적은데다, 중증으로 진행된 케이스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백신은 효능·접근성·경제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 백신을 먼저 접종한 미국·유럽에서 일부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런 정보들을 파악해 누구에게 백신을 먼저 접종할 지보다 어느 집단에게 안 맞힐지도 중요하다. 지금은 전문가들에게 맡겨 복수의 백신들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집단면역을 구축할지 설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