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외적보다 내분이 더 무섭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20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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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워싱턴 특파원 시절의 경험 중 지금도 떠오르는 게 2015년 9월 보수단체 집회에서 만났던 ‘현수막 백인 남성’이다. 이 집회엔 당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도널드 트럼프가 참석했다. 트럼프를 보기 위해 군중이 몰린 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 남성이 한국을 사례로 들어 불법이민 장벽을 설명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트럼프’라고 쓰인 현수막을 동료들과 함께 들고 있던 그는 “한국에도 남북 간에 장벽이 세워져 있지 않는가. 나도 (불법 입국을 막을) 장벽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한 고등학교를 거론했다. 이 학교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란다.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가. 내가 낸 세금이 스페인어를 쓰는 학교에 들어간다. 불법체류자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내 돈을 쓰고 있다.”

트럼프, 국경은 막았지만
안에선 인종·이념 장벽
대의 민주주의 실패 귀결
미국, 쇠락과 부활 기로에

이날 집회의 주인공은 단연 트럼프였다. 공화당의 현직 상원의원도, 전직 주지사도 찬조 출연에 불과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원고도 없이 토해 내는 트럼프의 즉석연설에 열광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주눅 들어 마음 한켠에 몰래 숨겨왔던 자신들의 속내를 거침없이 대변하는 트럼프는 이들에게 시원한 생수였다.

6년 전 트럼프가 포효했던 의사당 앞은 이제 ‘트럼프 집권 4년’의 결과를 보여준다. 극우 세력의 의사당 난입을 겪은 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의사당 주변은 출입금지 구역이 됐다.

불법 이민자와 유색 인종에게 터전을 잠식당한다고 느끼는 백인 사회의 분노에 기대 당선됐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층의 불안을 해소하지도, 그렇다고 백인-비백인의 갈등을 줄이지도 못한 채 물러난다. 트럼프 4년을 거치며 21세기의 제국 미국은 내부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유지해야 하는 제국의 과제는 외치와 내치 모두에 있다. 다양성에서 에너지를 얻으면서 일체감을 유지하는 게 제국의 과제다. 엄청나게 확장된 동서남북 국경선 바깥의 적들을 막으면서, 동시에 장벽 내부에선 제국의 분열을 차단해야 한다. 로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도 지켜야 했고, 황제를 향한 암살 시도도 막아야 했다. 고구려는 최강국 수와 당의 침입을 연달아 격퇴했지만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이 갈라서자 철벽같았던 요동의 ‘산성 장벽’이 무너졌다.

서소문 포럼 1/20

서소문 포럼 1/20

그간 21세기의 제국 미국은 나라 바깥에선 빛나는 장벽을 쌓아 올렸다. 과거 로마 군단이 고전하기도 했던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미국은 대서양 동맹을 완성해 미국과 서유럽을 하나로 묶는 강철 대오를 구축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일본에 이어 한국을 교두보 삼아 다시 제국을 꿈꾸는 중국을 틀어막는 장벽을 만들어놨다.

하지만 트럼프 4년을 돌이켜보니 더 큰 위협은 나라 안에 있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남쪽에 국경 장벽을 높이 쌓았지만 제국은 장벽 안에서 쪼개지고 있었다. 국경장벽으로 불법 이민은 줄였지만 나라 안에선 인종 장벽과 이념 장벽이 더 높이 세워졌다.

충격적인 의사당 난입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는 미국의 분열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난입 사태 당일인 지난 6일 실시했던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2%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답했다. 그런데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면 미국민은 건널 수 없는 강 양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갈라져 있다. 공화당 지지자의 68%는 ‘위협이 아니다’라고 했고, 민주당 지지자의 93%는 ‘위협’이라고 답했다. 이후 여론조사들도 영락없이 당파성에 따라 물과 기름처럼 갈린다.

트럼프의 실패는 미국 의회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워싱턴 장외 선수였던 트럼프는 자신의 기반이 없었던 의회의 대의민주주의 대신 지지층을 직접 상대해 자극하고 동원하는 트럼프 스타일로 나섰고, 결과적으로 이는 의회의 갈등 조정과 타협 역할을 위축시켰다. 트럼프의 부상은 거꾸로 그동안 의회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며 민의를 대변해 상치하는 집단의 이해를 조정해내는 역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백 년 후 역사가들은 지금의 미국을 어떻게 기록할까. 21세기의 제국 미국이 쇠락하기 시작하는 터닝 포인트로 기록할까, 아니면 분열 위기를 맞았던 미국이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통합을 이루는 두 번째 남북전쟁기로 기록할까. 미국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바이든 당선인을 포함한 ‘포스트 트럼프’ 대통령들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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