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심심한 동치미 마시는 듯…힐링 되는 복고 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2021.01.18 13:00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67)

22년 2개월이면 얼마나 긴 세월일까?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성인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혹여 제 밥벌이를 하는 나이이기도 하고 아니면 학교에 다니거나 국방의 의무를 지키고 있을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긴 시간임이 분명하다. 하물며 단 일회에도 몇 년, 아니 몇십 년을 뛰어넘는 게 가능한 드라마라면? 눈치채셨다시피 최장수드라마 ‘전원일기’ 이야기다.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의 주축인 세 할머니.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의 주축인 세 할머니.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코로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그래선지 안팎으로 어수선한 요즘 난데없이 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그건 바로 최상류의 판타지 드라마도, 달달 로맨스를 다룬 것도 아닌 농촌드라마 ‘전원일기’다. 각종 양념에 온갖 재료로 버무린 감칠맛 나는 요리보다 그저 심심한 동치미를 천천히 홀짝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자꾸 빠져들고 있다. 이유는 모른다.

재밌는 건 이런 현상은 나만이 아닌가 보다. 복고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케이블방송에선 온종일 재방에 또 재방이 거듭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방영 순서가 뒤섞여 여기선 아이의 아빠였는데 딴 채널에선 어느새 총각이 되어있다. 또 일인 다역이 흔한 탓에 가겟집 쌍봉댁은 읍내 노처녀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머니였다가 읍내 식당 주인도 되고 친척 아주머니가 되기도 하는 타임슬립을 보여준달까?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총 22년 2개월 동안 방영되었다고 하니 그런 사소한 티쯤이야 오히려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응삼이 장가가는 날

농촌총각의 대명사였던 응삼의 결혼식. 얼마전 별세한 배우 박윤배의 열연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사진 MBC]

농촌총각의 대명사였던 응삼의 결혼식. 얼마전 별세한 배우 박윤배의 열연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사진 MBC]

그날도 전원일기를 보고 있었다. 마침 노총각 응삼이(박윤배 분)가 읍내다방에서 맞선을 보는 장면이었다. 잘 다려진 응삼의 양복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마냥 컸다. 또 속칭 2 대 8 가르마로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는 왜 그리 어색한지…. 그날도 어김없이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응삼. 내 가족을 대하는 것 마냥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 응삼을 연기한 박윤배 배우의 사망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극 중 에피소드에 마음이 아팠는데,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기분이었다. 몇 분 만에 몇십 년이 왔다 갔다 한 느낌이다. 극 중 응삼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게 아내가 손수 떠주는 조끼 스웨터라고 허구헌날 불고 다닌다. 그의 바람대로 뒤늦게 만난 동반자 쌍봉댁이 떠 준 스웨터는 유난히 따뜻해 보였는데 말이다.

양촌리 마초는 바로 그!

무려 22년 2개월이라는 최장기 방영기록을 자랑하는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최근 옛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사진 MBC]

무려 22년 2개월이라는 최장기 방영기록을 자랑하는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최근 옛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사진 MBC]

22년간을 남의 집 안방을 들여다보듯 자연스레 이어졌던 이야기는 지금 보니 새삼스러운 게 몇 있다. 전무후무한 자상한 아버지로 자리매김한 김회장(최불암 분)의 또 다른 모습이다.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인 그는 정작 아내에겐 그 시절 여느 남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마초스럽다고 할까? 툭하면 핀잔에 명령하기 일쑤임은 물론이고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길 강요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지치게 더운 여름, 민소매 옷을 입은 며느리를 세상 못 볼 사람 취급을 한다. 읍내 노래방에 간 두 며느리에게 대역 죄인이라도 되는 듯 호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알고 보니 물 한잔도 손수 떠먹는 법이 없는 간 큰 남자였던 것이다. 이럴 수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몇십 년 전의 시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게 틀림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퉁명스런 말투와 행동에 숨은 애정을 간간히 들키곤 하는데, 자식들과 소통하고 싶다며 당시로는 최신 댄스곡인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어설프게 부르는 장면도 있다. 스탠드 마이크 대신 방 빗자루를 들고서. 어느 회차에선 아내가 죽는 악몽을 꾸다 깨어난 김 회장, 곤히 잠든 아내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부애를 내비치는데…. 그럼 그렇지, 마초여도 퉁명스러워도 역시 양촌리 김회장이다.

우리 엄니는 못 말려, 일용엄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생각하는 전원일기의 주인공은 일용엄니다. 출연 당시 갓 서른을 넘긴 꽃다운 미모로 사시사철 할머니로 살아야만 했으니 그 고충이 어땠을까? 동료 배우들은 로맨스 작품에서 예쁜 옷을 입고 나오는데 자신의 역이 너무 싫어 도망(?)갔다고도 하고, 특유의 일용엄니 톤을 내다보니 성대에 무리가 왔다고도 한다. 역시 타고 난 배우다.

올해로 40년이 된 드라마 전원일기, 과연 일용엄니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재방에 재방을 거듭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을까? 극 중에서 아들 일용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아무튼 우리 엄니는 못 말려!’ 그 못 말리는 수다와 오지랖이 전원일기의 백미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종영된 드라마 전원일기가 요즘 부활하고 있는 모양이다. 비록 이 채널에선 젊은 모습이었다가 다른 채널에선 나이 지긋한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문제없다. 당최 전개를 예상하기조차 힘든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그저 우리 집, 아니 건너 집의 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즘 드물게 드라마로 힐링 중이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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