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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 섬처럼 내려앉은 도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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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도예·조각·건축을 공부한 이헌정은 다양한 실험으로 조선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스툴(2020, 세라믹, 46x52x49cm. [사진 박여숙화랑]

도예·조각·건축을 공부한 이헌정은 다양한 실험으로 조선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스툴(2020, 세라믹, 46x52x49cm. [사진 박여숙화랑]

서울 이태원동 박여숙 화랑 전시장에 기묘하게 생긴 조각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자로 재거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한 모양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두루뭉술하게 생긴 덩어리들이 혼자인 듯, 따로인 듯 몸을 웅크리고 있다. 40여 점의 이 도자 조형물은 모두 도예가 이헌정(53)의 작품이다.

이헌정 도예전 ‘만들지 않고 태어난’ #대형 스툴·테이블 등 40여 점 전시

흔히 도자로 만들어진 작품을 떠올리면 그릇이나 화병, 연적 혹은 책상에 올릴 정도 크기의 조형물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 크기에서부터 고정관념을 깬다. 작품은 바위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여러 작품이 함께 놓여 있는 전시장 풍경은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도해를 닮았다.

이번 도예전 제목은 ‘이헌정의 도자, 만들지 않고 태어난’이다. 도예를 바탕으로 설치, 가구 등 다양한 작업을 펼쳐온 작가의 스툴 작품을 집중해 보여주는 자리다.

도예·조각·건축을 공부한 이헌정은 다양한 실험으로 조선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헌정 도예 전시장 전경. [사진 박여숙화랑]

도예·조각·건축을 공부한 이헌정은 다양한 실험으로 조선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헌정 도예 전시장 전경. [사진 박여숙화랑]

이헌정 작가는 흙으로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며 ‘그릇’의 틀에서 벗어났듯이, 절대적인 대칭이나 엄격한 비례의 틀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대신 각 덩어리 작품에 푸근한 손맛을 더했다. 화룡점정은 채색이다. 바닥 면을 제외하고 최소 다섯 개 면을 노출하고 있는 스툴은 다섯 폭의 추상회화 작품 같다. 황토색 바탕에 자유분방한 에머럴드 빛 문양, 백자 표면 위 검붉은 산화철 물감이 그 자체로 그림이 됐다. 평소 “나는 우연을 즐긴다”고 말하는 작가는 “도자가 가마에서 완성되는 과정에서 둥글고 비뚤어지고 유약이 흘러내려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럴 때 나는 노동을 제공할 뿐 도예를 완성하는 것은 다른 존재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헌정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한 뒤 조각과 건축공부까지 섭렵했다.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가천대에서 건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통에 무겁게 짓눌리는 게 두려워 긴 여행을 떠났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게 됐다”고 말했다. 건축을 공부한 것도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들을 탐구하며 나를 들여다보는 여행이었다”고 덧붙였다.

이헌정의 작품은 ‘빛의 작가’라 불리는 제임스 터렐(77), 스스로 도자 작업을 하기도 하는 배우 브래드 피트(57) 등 해외 유명인사들이 소장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건수 미술평론가는 “이헌정의 도예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움, 천진난만함, 거침없음”이라며 “그의 작품은 존재감을 내세우지만 푸근하다. 그가 불어넣은 둥근 몸뚱이들은 활기찬 생명력을 뿜어낸다”고 말했다. 한편 “나이 쉰을 넘으며 작업에 대한 초조함이 줄었다”는 작가는 “50대가 되고부터는 좀 더 순수하게 작업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실험을 계속해 나가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전시는 28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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