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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람 냄새가 그리운 걸까? 집콕 속 부활한 '전원일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6) 

춥다. 눈물 찔끔 날 만한 추위는 물러가고 바람도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만만찮은 날이다. 이런 날이면 양지바른 밭두렁에 세 노인이 모여 앉아 불을 지핀다. 그러곤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건넨다. “금동아, 어디 가냐?”

'전원일기'의 한 장면이다. 코로나 이후 텔레비전 앞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는데, 무료하게 채널을 돌리다가 '전원일기'가 나오면 멈춘다.

처음에는 흐릿한 옛날 화면과 배우들의 전성기 모습이 정겨워 잠시 쳐다보다가 차츰 집중하게 되고, 끝까지 보게 되고, 이제 아예 채널과 시간대를 기억해 그 시절로 빠져들곤 한다. 중독이다.

종영한 지 20년 된 MBC 드라마 전원일기가 요즘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단절된 코로나19 시대에 대가족제도의 왁자한 정서가 그리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MBC]

종영한 지 20년 된 MBC 드라마 전원일기가 요즘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단절된 코로나19 시대에 대가족제도의 왁자한 정서가 그리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MBC]

1980년부터 2002년까지 총 1088회 방영된 국내 최장수 드라마이니, 나로서는 중학생 때부터 학부모가 될 때까지 접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별로 관심 없었다. 전원보다는 도시에서 재미 느끼며 살기에도 바쁜 시절이었다.

게다가 빠른 리듬과 밀도 있고 복잡한 주제로 전개되는 드라마에 비해 농촌 생활 드라마는 지루했다. 주제는 상투적이었고 촌스러운 모습의 중년 연기자들 연기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매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나와 내 이웃, 아니 우리 도시인의 삶 속에 저런 여유와 인정이 있었을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다가온다.

극의 구성은 단순하다. 우연히 작은 사건이 벌어지면 당사자는 놀라 밤새 잠 못 이루고, 결국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한 후 평화가 찾아온다. 서로 오해하고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살가운 이웃으로 되돌아오는, 전통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다. 그 모든 게 한 시간에 끝나야 하니 어려운 복선도 별로 없다. 그런데 재미있다. 아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다시 보니 출연자들 연기력도 대단했다. 어제 본 것은 590화 ‘아버지의 노래방’이었다. 늘 근엄하고 합리적이며 인자한 시아버지 김 회장(최불암)이 평소답지 않게 노래방에 다녀온 며느리들을 야단친다. 노래방이 막 생겨나던 때다.

아버지가 너무하다 싶어 두 아들이 조심스레 말씀드리자 그도 느낀 게 있고 미안해져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난데없이 가족 오락회를 소집한다. 평소 집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해법에 가족들은 어색해하지만, 그래도 결자해지랍시고 김 회장 자신이 먼저 한 곡 뽑겠다며 억지로 부인을 붙잡아 일으켜 춤추며 노래하다가 이런, 외출에서 돌아온 노모께 그 모습을 들켜버렸네!

가장이 채신머리없이 군다며 예순 넘은 아들을 꾸중하니, 자식들은 평소 근엄하던 아버지가 야단맞는 모습을 본 척도 못 본 척도 못 하며 뻘쭘하게 있는 장면에서 끝난다. 상황이 은근히 재미있으면서, 요즘 말로 ‘망가지는’ 역할을 최불암이라는 국민배우가 까불대지 않고 그의 캐릭터대로 소화해내는 것을 보니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어머니상이라는 차분한 시어머니(김혜자)도 며느리들과 벌이는 신경전이나 눈치 살피고 토라지고 위트 발휘하는 연기에서는 사람이 달라지고, 늘 푼수 없이 말 퍼트리고 다니는 일용엄니(김수미)도 촌철살인 한 마디로 마을 기강을 잡곤 한다.

전원일기에 재미있게 빠져들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많은 극 중 상황과 장면이 이해하기 힘들 텐데 고부 관계가 특히 그럴 것 같다. [사진 MBC]

전원일기에 재미있게 빠져들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많은 극 중 상황과 장면이 이해하기 힘들 텐데 고부 관계가 특히 그럴 것 같다. [사진 MBC]

조연급 역시 녹록지 않다. 늘 김 회장댁이나 복길이네 에피소드만 나올 수는 없으니 종종 마을 사람 중심의 이야기도 구성되는데, 노마네, 종기네, 재동이네, 보배네, 숙이네, 섭이네, 쌍봉 댁, 응삼이 등 모든 출연진이 눈물이면 눈물, 액션이면 액션(그래봤자 밀고 당기는 싸움), 미묘한 감정 연기까지 사람을 몰입하게 한다.

이 드라마가 좋아지는 건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코로나19 때문이다. 누구하고 마음 편히 차 한잔 못 하고 단절된 채 지내는 상황이 길어지다 보니 살갑게 사람 만나 웃고 떠들고 술 한잔하고 때로는 티격태격 다투는 일마저 그리워진다. 그래서 집집이 이 드라마가 부활하고 있는 것 같다.

전원일기는 시간여행이다. 그때로 돌아가지 않고 요즘 시각에서 본다면 재미는커녕 고구마가 목에 걸린 듯 답답할 수 있다. ‘관계’만 있고 ‘나’는 없는 대가족 체제, 어른들의 완고함에 눌려 자식 특히 며느리들이 부엌에서 한숨짓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늘 정체된 것 같은 농촌 모습에도 시대변화가 보인다. 노총각 장가가기, 농작물 가격 파동 같은 현실감 있는 주제도 그렇고, 신용카드, 노래방, 핸드폰 같은 신문물이 나올 때마다 마을이 홍역을 치른다. 요즘 시각에선 당연한 일이라도 기억을 떠올려보면 당시에는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나?’ 하지 않았던가.

김 회장댁과 일용네(복길이네)가 극의 중심에 있지만 마을 이웃을 연기하는 조연급 배우들도 연기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사진 MBC]

김 회장댁과 일용네(복길이네)가 극의 중심에 있지만 마을 이웃을 연기하는 조연급 배우들도 연기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사진 MBC]

드라마가 끝난 지 20년 가깝다. 친근했던 배우도 하나둘씩 떠나간다. 얼마 전에 박윤배 배우(응삼이역)가 돌아가셨고, 정애란(김 회장 모친), 이미지(노마 엄마), 정태섭(이 노인) 같은 훌륭한 배우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물론 드라마를 사랑한 많은 시청자도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이 얼마나 생활 속에 파고들었으면,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하기 힘든 노인분들은 양촌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어 했고, “세상의 얼마나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최불암과 김혜자가 진짜 부부라고 믿은 채 돌아가셨을까?”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편안한 분위기와 정서는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러니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그 장면이 나오면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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