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당 1억에도 대기 넘쳐"…'강남 황족' 인증서 준 文정부

중앙일보

입력 2021.01.16 00:42

업데이트 2021.01.16 00:46

더 강해진 강남 불패

연초부터 아파트 신고가 거래가 줄을 잇고 있는 서울 강남권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연합뉴스]

연초부터 아파트 신고가 거래가 줄을 잇고 있는 서울 강남권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연합뉴스]

“어디 사세요?” 특별할 게 없는 질문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상대방은 ‘신분이 무엇이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주택시장 양극화로 자산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어디에 살고, 어떻게(자가·전세) 사는지’가 신분(계급)인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인터넷엔 이를 도식화한 ‘부동산 계급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는 곳(자가 기준)에 따라 황족부터 왕족, 중앙귀족, 지방호족, 중인, 평민으로 나뉜다.

교육·경제·교통·문화 인프라 최상
500대 기업 CEO 3분의 1 거주

재건축 규제, 공급 줄어 몸값 올라
상속·증여 대물림으로 매물 줄어

집값·전셋값 뛸수록 수요 더 몰려
불안심리 확산돼 패닉바잉 거세

황족은 단연 서울 서초·강남구다. 황족 내에서도 계급이 나뉘는데, 정점(계급도상 그랜드마스터)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와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아파트가 있다. 이 같은 부동산 계급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2017년 출범과 동시에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내놓은 각종 규제책이 되레 강남 아파트의 희소성을 높이고, 비(非)강남 거주자의 패닉바잉(공포 매수)을 부추긴 결과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월 둘째주(11일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보다 0.07% 올랐다. 강남 4구(서초·강남·송파·강동구)가 급등하며 상승폭이 전주보다 커졌다. 서초구와 강남구는 전주보다 각각 0.1%, 송파구는 0.14% 올랐다. 이곳에선 연초부터 신고가 거래가 줄을 잇고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6차 144.2㎡(이하 전용면적)는 지난달 31일 39억7000만원 거래됐고, 같은 동 현대5차 82.23㎡도 지난달 28일 29억7000만원에 거래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풍선효과로 강남 외 서울·수도권이나 지방 집값이 급등하면서 상대적으로 강남 아파트값이 저렴해 보이는 탓이다. 이른바 역(逆)풍선효과다. 반포동 바른부동산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아크로리버파크 등 인근 새 아파트는 가격이 3.3㎡당 1억원에 이르지만 대기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강남은 부동산 계급의 정점”

정부는 지난 4년간 재건축 규제, 대출 축소, 거래·보유세 강화 등으로 쉴 새 없이 ‘강남과의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이 규제지역으로 묶이면서 서울 강남 주요 아파트로 자금이 다시 몰리고 있다. 전방위 압박에도 강남 아파트값이 잡히지 않는 건 넘쳐나는 수요 때문이다. 반세기 전 강남은 불모지였지만 오늘날의 강남은 한국에서 경제·교육·교통·문화·상업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진 곳이다. 이 같은 환경 덕에 자연스레 부촌이 된 강남은 그 자체가 브랜드이고, 프리미엄이다. 대한민국에서 강남에 산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상징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수요를 억제해도 수요가 늘고, 가격이 오른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규제를 하거나, 가격이 뛰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심리(missing out)가 확산한다”며 “강남은 특히 부동산 계급의 정점에 있는 만큼 이 같은 불안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불안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분야는 교육이다. 강남엔 이른바 ‘강남 8학군(서초·강남구)’으로 불리는 명문고가 몰려 있고, 강남구 대치동은 사교육 1번지로 불린다.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9학년도 기준 고3 학생 1000명당 서울대 입학생 수는 서초구가 28.3명으로 가장 많았고, 강남구가 27.1명으로 뒤를 이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웬만한 직장인 월급보다 많은 임대료를 부담하며 강남에 머무르는 사례는 흔하다. 대치동 A아파트에서 600만원짜리 월세(보증금 7억원)를 살고 있는 의사 장호승씨는 “고2인 첫째와 중3인 둘째가 대학에 갈 때까지 강남에 거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서초구 반포동 반포리체 84㎡(이하 전용면적) 전셋집은 21억8500만원에 계약됐다. 서울에서 신고된 84㎡ 전셋값 중 최고가다. 반포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은 “임대료가 오르면 오를수록 경제력을 갖춘 사람만 거주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며 “강남에선 이런 욕구가 또 다른 매력이 되고,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정부의 특목고·자사고 폐지 정책으로 이 같은 분위기가 더 견고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전국 각지의 특목고·자사고로 분산시켜 놓았지만 다시 명문 일반고가 많고 사교육 시장이 좋은 강남으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자사고 폐지 정책으로 학부모의 강남 쏠림 현상이 생기면 강남 8학군이 재등장할 수 있다”며 “대책 없이 자사고를 폐지하면 기존 선례처럼 집값 폭등과 같은 또 다른 병폐를 낳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 정부와 마찬가지로 ‘강남 집값’과의 전쟁을 벌였던 노무현 정부는 강남 8학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2005년 학군 조정을 추진한 바 있다(결과적으로 2010년 고교선택제 시행).

강남에는 주택 수요를 빨아들이는 일자리도 풍부하다. 사업체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데, 매출 기준 500대 기업의 본사가 송파구를 포함한 강남 3구(106곳)에 몰려 있다.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 3분의 1도 강남 3구에 산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이 가장 많은 자치구 역시 강남구(2017년 기준 6만8060곳)다. 회사와 일자리가 몰려 있는 만큼 당연히 경제력도 높다. 강남구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17년 기준 65조2870억원으로 단연 1위였다. 2위 중구와의 차이가 14조원이나 됐다. 서초구는 33조7720억원, 송파구는 26조8160억원이었다.

강남 대체지 꾸준히 개발해야 시장 안정

문 정부가 강남 집값과의 전쟁에서 패한 건 국민들의 욕구와 강남의 특성을 간과한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문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2018년 9월 5일 당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강남 집값 불안에 대해 “모든 국민이 강남에 살 이유가 없다. 내가 살아봐서 안다”고 말했다. 이듬해 5월엔 당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수도권 3기 신도시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신도시가 강남권 수요를 흡수하는 지역이 부족해 보인다”는 질문에 “강남이 좋습니까?”라고 되물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주거정책 당사자들이 더 나은 교육환경,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국민의 욕구를 읽지 못하고 전쟁에 나섰으니 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문 정부는 수요를 막는 데도 실패했지만, 수요 억제 정책으로 강남 아파트의 희소성만 더 키웠다. 15억원 초과 주택에 대한 대출 금지로 불안심리도 확산했다. 이 와중에 상속이나 증여를 통한 ‘계층 상속’ 또는 ‘계급 승계’가 줄을 이으면서 패닉바잉이 거세졌다. 지난해 1∼10월 서울 아파트 증여 1만9108건 가운데 30%인 5726건이 강남 3구에서 이뤄졌다. ‘황족’인 부모의 계급을 그대로 자식이 승계한 것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이른바 부의 대물림은 시장에서 매물을 줄이는 요소이자 패닉바잉의 동력원”이라고 말했다.

문 정부에 앞서 ‘강남과의 전쟁’을 치렀던 노무현 정부 때와 달리 ‘수요 분산책’을 쓰지 않았던 것도 패착이라는 지적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과 동시에 “강남불패라고 하는데, 그 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도 불패”라며 강남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건축 규제를 시작한 것과 동시에 강남 접근성이 좋은 위례·판교·광교·동탄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수요 억제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보고 강남을 대체할 만한 신도시 건설에 나선 것이다. 이와 달리 문 정부는 집권 3년이 지나도록 “공급은 충분하다”며 수요만 억제하다 뒤늦게 3기 신도시 건설 계획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강남 집중 현상을 해소해야 그나마 강남 집값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정반대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만 해도 강남 수요를 분산하기 위해 강남을 경유하게 설계했지만, 이게 되레 ‘강남 집중화’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속도로·고속철도가 개통하면 대도시가 주변 중소도시의 인구나 경제력을 흡수하는 이른바 ‘빨대효과’에 대한 우려다. 1960년대 일본 고속철도 신칸센이 들어서면서 대도시인 도쿄·오사카에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된 예가 대표적이다. 김학렬 스마트튜브 부동산조사연구소장은 “강남에 버금가는 대체 주거지를 계속 개발해 강남에 집중된 욕구를 분산해야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강남에서의 주택 공급도 꾸준히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체 주거지를 개발하는 것과 동시에 주택 수요가 많은 강남에서의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에선 집 지을 땅이 없어 사실상 재건축 외에는 공급 방법이 없다. 하지만 겹겹의 규제로 사실상 재건축 사업은 멈춰 있다. 정부는 공공재건축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공공재건축을 하겠다고 나서는 강남 재건축 단지는 거의 없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당장 눈 앞의 것을 규제하는 차원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꼼꼼히 계획을 세워 지속적으로 공급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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