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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증거보다 동물실험 우선이냐" 무죄 판결에 화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중앙일보

입력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증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증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판결 나던 날, 저녁 준비하다가 무죄 뉴스를 듣고 모든 걸 좋은 뉴스만 들었어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른 뉴스도 찾아봤는데…어떻게 그런 판결이 난 건지…”

김미향(39)씨가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2일 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0살 쌍둥이 딸을 둔 김씨는 “애들 몸은 다 만신창이가 돼 있잖아요. 내 아이 몸만 봐도 알겠는데, 눈으로 보면 아는데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인지, 납득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14일 오전 종로구 환경보건센터에서 SK‧애경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모여 재판부의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화로 기자회견에 참여한 김씨의 쌍둥이 딸들은 태어난 지 3개월 이전부터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했고, 이후 폐섬유화와 기흉 등으로 치료를 받았다. 2012년 2월부터 1통 반 정도를 사용했다.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1년 8월이다. 이후 11월 옥시 등 6개 제품이 강제회수 조처됐지만, 그 밖의 제품에는 ‘사용 자제’ 권고만 내려졌다. ‘가습기 메이트’는 ‘사용자제’ 권고 품목이었다.

김씨의 큰딸은 심한 폐섬유화로 15개월에 기관절개를 해 목에 튜브를 갖고 있다. 김씨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는데, 학교에서 아이들이 ‘가습기살균제’라고 놀린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사태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환경부는 대체 어떻게 했길래…"

14일 오전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기자회견에서 김선미씨가 딸이 사용하는 약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연 기자

14일 오전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기자회견에서 김선미씨가 딸이 사용하는 약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정연 기자

가습기살균제의 위험이 알려지기 전인 2008년 ‘가습기메이트’를 구입해 1병을 사용한 김선미(36)씨는 두 아이와 본인까지 가족 3명이 천식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 모니터링에서 14세 딸은 폐활용능력 69%, 12세 아들은 65%가 나왔고 본인은 71%로 나타났다. 김씨는 “가습기살균제 당시에는 온갖 부비동염, 급성충농증 등 호흡기질환을 달고 살던 남편만 폐 기능이 80~90%로 정상”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어제 판결 뉴스를 보고 딸이 ‘엄마, 그럼 나는 무슨 피해자야?’라고 묻는 데 답을 할 수가 없었다”며 “기업이 책임진 뒤 아이들에게 사과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재판부 때문에 저는 무능한 엄마가 됐다”며 울먹였다.

김씨의 분노는 환경부를 향했다. 그는 “환경부는 진짜 뭘 한 건가, 어떻게 나태하게 했길래 결과가 이렇게 나오게 하나. 재판을 담당해 온 환경부는 대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싸웠길래, ‘인과관계가 없다’는 말이 나오게 하냐”고 말했다.

"사람 증거보다 동물실험이 우선이냐"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이 SK케미칼, 애경 전 대표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뒤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이 SK케미칼, 애경 전 대표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뒤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2004년 12월부터 6개월간 가습기메이트 한 통의 80% 정도를 사용한 손수연(45)씨는 “이번 판결에서 ‘사람에게서 폐섬유화가 발생했지만, 동물실험에서 확인되지 않았으니 증명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앞뒤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며 “‘동물실험에서 보이지 않지만, 인체에서 나타났으니 업무상 과실치상이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손씨는 “하루 10시간 넘게 진행되는 재판에서, 전 SK 연구원도 ‘실험 중 손에 닿았더니 수포가 생기는 독성 있었다’ 증언을 했는데, 판결문을 보면 쥐 몇 마리로 ‘인과관계’를 따진다”며 “동물실험은 직접증거가 아니라 참고로 봐야 하고, 직접 증거는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제품으로 소비자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그걸 소비자가 밝혀야 하는 건지 의문"이라며 "앞으로 추가 피해자 기자회견과 전문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판결의 부당함을 알리겠다"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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