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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떠났지만 전시는 예정대로 연다...펜화가 김영택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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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본지에 '펜화기행'을 연재하던 당시의 김영택 화백. [사진 중앙포토]

2000년대 초반 본지에 '펜화기행'을 연재하던 당시의 김영택 화백. [사진 중앙포토]

0.05㎜의 펜 끝으로 우리 건축 문화재를 복원해온 펜화가 김영택 화백이 13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76세.

20일 인사아트센터 개인전 개막 #"펜화와 함께한 삶 자체가 축복"

김 화백은 서양에서 시작된 펜화를 독학으로 익힌 뒤 역사적 고증을 거쳐 우리 전통 건축물을 펜화로 복원하는 데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화업 30년을 결산하는 마지막 개인전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눈 감아 주변을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김 화백은 1945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숭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산업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3년 국제상표센터가 세계 정상급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주는 '디자인 앰배서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생전 당시 전시장 작품 앞에 선 김영택 화백. 그는 자신을 "건축물 기록화가"라고 불렀다. [사진 중앙포토]

생전 당시 전시장 작품 앞에 선 김영택 화백. 그는 자신을 "건축물 기록화가"라고 불렀다. [사진 중앙포토]

디자이너로 성공했지만 1994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서양식 건축물을 세밀하게 묘사한 펜화를 접한 뒤 나이 오십에 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펜화는 펜촉을 사포로 갈아 0.05㎜, 0.03㎜ 굵기로 만든 뒤 도화지에 선을 50만∼80만번 그어 완성하는 작업. 펜화를 시작하며 그는 전국을 돌며 우리 문화재를 한국적 화풍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현재 보이는 모습만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료를 뒤져가며 유실되거나 손실된 부분까지 온전하게 되살리는 데 정성을 쏟았다.

김 화백은 평소 자신을 "건축물 기록화가"라고 소개하며 "훼손된 문화재를 복원해 그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해왔다. 이런 신념으로 화재로 소실됐던 숭례문의 1910년대 전경을 비롯해 양산 통도사, 해인사 일주문, 광화문, 밀양 영남루,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등을 작품으로 남겼다. 2001년부터 본지에 '펜화기행'을 연재하기 시작해 어깨 통증으로 작업을 중단한 시간을 제외하고 2012년까지 꼬박 10년을 연재했다. 또한 한국펜화가협회 회장을 맡는 등 펜화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김영택 화백이 김동현의 복원 설계와 사료를 참고해 그린 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사진 김영택 ]

김영택 화백이 김동현의 복원 설계와 사료를 참고해 그린 황룡사 9층목탑 복원도. [사진 김영택 ]

김영택 화백이 복원해 그린 숭례문과 주변 풍경. [사진 김영택]

김영택 화백이 복원해 그린 숭례문과 주변 풍경. [사진 김영택]

김영택 화백이 펜화로 재현한 창덕궁 주합루. [사진 중앙포토]

김영택 화백이 펜화로 재현한 창덕궁 주합루. [사진 중앙포토]

김 화백은 ‘김영택 화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맨눈으로 피사체를 직접 보며 느끼는 비례와 임팩트를 고려해 강조해 묘사하는 방법이다. 그는 “사람의 눈은 부분을 보면서 멀리 있는 것도 댕겨본다"면서 "정교하면서도 그림의 미학을 살려 현장감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펜화가협회 회장을 맡는 등 펜화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김 화백은 2019년 5월 개인전을 열며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은 사실을 전했다. 그는 "3개월 전에 대장암 말기(4기)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펜화를 그리며 경험한 ‘무아지경’ 몰입의 순간들, 펜화와 함께 한 삶 자체가 내겐 축복이었다"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항암 치료 중에 준비해온 고인의 전시 '김영택 펜화전'은 예정대로 20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개막해 다음 달 15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주관하고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후원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청계천 수표교 복원화' '종묘정전''프랑스 노르망디 몽생미셸'등 고인의 펜화 원화 40여 점이 공개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종란 씨와 아들 김한열(하나사인몰 대표), 김준범(필코리아) 씨가 있다. 빈소는 인천 청기와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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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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