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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살릴 기회 놓쳤다…9세 참극뒤 英선 감정학대도 징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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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25일 영국의 한 병원에 아홉살 소녀 빅토리아 클림비가 실려 왔다. 아이의 몸에서 발견된 상처만 128개, 여기에 장기 손상에다 영양 결핍, 저체온증세까지 보였다. 아이는 다음 날 숨을 거뒀다. 조사가 시작됐고, 보호자인 이모할머니와 동거남의 끔찍한 학대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아동을 혼자 집에 두어도 아동학대 신고 대상이 된다. [픽사베이]

미국에서는 아동을 혼자 집에 두어도 아동학대 신고 대상이 된다. [픽사베이]

이들은 수개월 간 아이의 몸에 뜨거운 물을 붓는가 하면 담뱃불로 지지고, 자전거 체인으로 때렸다. 죽기 전날에도 손발을 묶은 채 화장실에 가둬놨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검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최악의 아동학대 사례”라며 진저리를 쳤다. 법원은 살인혐의를 인정해 이들에 종신형을 선고했다. 사형제가 없는 영국에서는 최고 법정형이었다.

13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정인이 사건' 첫 공판에서 검찰은 양어머니 장모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당초 아동학대 치사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겼지만 법의학자들의 재감정을 거쳐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참혹한 사건에 여론이 들끓고, 살인 혐의를 놓고 재판이 열리게 된 상황은 일단 21년 전 영국과 같다. 하지만 이후 아동보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영국과 결과까지 같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관건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국가적 대응과 노력이 얼마나 꾸준히 이어질 수 있느냐다.
당시 영국은 재판 결과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왜 수많은 기관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철저히 따지고, 복기하고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나온 처절한 반성문이 이른바 '레이밍 보고서'다.

영국의 '130년 장기전'…실패에서 배웠다

2000년 영국에서 친척의 학대로 숨진 빅토리아 클림비(당시 9세) [영국 레이밍 보고서 캡처]

2000년 영국에서 친척의 학대로 숨진 빅토리아 클림비(당시 9세) [영국 레이밍 보고서 캡처]

아이들을 학대로부터 지키는 건 선진국들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영국 역시 1889년 '아동헌장(Children's Charter)을 제정한 이후 100년이 넘도록 매달려왔다. 굵직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독립 조사단을 꾸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그 과정이다. '실패 보고서'를 통해 뚫린 구멍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보자는 의미다.

427쪽의 레이밍 보고서가 나오기까지는 15개월의 조사 기간과 380만 파운드(약 65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그렇게 작성된 보고서는 "클림비를 구할 수 있는 12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적시했다. 당시 수많은 관련 기관을 '눈뜬장님'으로 만든 주범으로 지목된 건 만연한 관료주의와 행정 편의주의였다, 한국의 경찰과 아동보호기관이 정인이를 지킬 세 번의 기회를 놓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클림비의 학대 정황이 발견된 건 아이가 숨지기 1년 전인 1999년 7월이었다. 의사는 클림비의 몸에서 상처를 발견했지만 "아이가 이 때문에 몸을 긁다가 생긴 상처"라는 보호자의 말만 듣고 그냥 돌려보냈다. 아이가 불결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사회복지사는 "이제 괜찮아졌다"는 말에 가정 현장 방문을 취소했다.

주요국 아동 학대 대응 방식. [중앙포토]

주요국 아동 학대 대응 방식. [중앙포토]

또 지역아동위원회가 사회복지센터와 의료기관에 관리가 필요하다는 권고를 내렸지만, 주말 저녁 어느 누구도 팩스를 챙기지 못하면서 접수가 누락됐다.

보고서 발표 이후 영국 정부는 '구멍' 메우기에 나섰다. 각 지방정부에 분산되어 있던 아동 관련 보건, 교육, 사회서비스를 '아동 서비스'로 한데 모아 일원화했다. 이를 통해 아동 관련 정보를 종합해 관리하고, 각 기관에서 올라오는 신고 접수를 다른 기관과 공유하는 정보 허브(local information hub)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고 사건도 이어졌다. 영국 정부는 그때마다 기존 자료를 다시 모아 들여다보고, 새로 확인된 구멍을 메우기 위한 대응 전략을 내놨다. 그중 하나가 2014년 제정된 '신데렐라법'이다. 마약 중독자인 친엄마가 네 살짜리 아들을 굶겨 죽인 사건이 계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물리적인 학대가 없더라도 부모가 오랜 기간 아이에게 무관심하고, 애정을 보이지 않을 경우 아동학대죄로 인정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속전속결은 없다" 스웨덴 체벌금지법의 교훈

아동 학대 문제에 '속전속결'이나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것은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스웨덴 내에선 17세기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시절부터 집안의 규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가정 내 체벌 문화가 이어졌다. 하인은 물론이고, 아내, 자녀, 노인에게도 가정 내 체벌이 있었다.

1971년 4살 소녀가 계부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정부는 아동권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79년 3월 ‘어린이와 부모법(Children and Parents Code)’ 개정안을 통해 세계 최초로 가정 체벌을 금지했다.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그러자 당시 스웨덴은 물론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모든 부모가 범죄자가 되고, 가정이 해체될 것"이라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스웨덴 정부는 단호했다. 법의 목적이 부모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양육,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득도 뒤따랐다. 처벌만으로 뿌리 깊은 인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있었다.

정부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 부모 교육을 강화했다. 각 지역 양육지원센터에 훈육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가 상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홍보물을 만들어 모든 가정에 배포했다. TV는 물론 매일 접하는 우유 팩에 관련 내용을 담은 만화를 실었다.

1979년 스웨덴이 가정체벌을 금지한 이래 2020년 7월 기준 체벌금지법을 도입한 나라는 60개국에 이른다. [아동 체벌 금지를 위한 글로벌 이니셔티브 홈페이지 캡처]

1979년 스웨덴이 가정체벌을 금지한 이래 2020년 7월 기준 체벌금지법을 도입한 나라는 60개국에 이른다. [아동 체벌 금지를 위한 글로벌 이니셔티브 홈페이지 캡처]

주기적으로 체벌 실태와 부모들의 인식변화 과정도 조사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40년을 투자했다.

2014년 스웨덴 정부와 세이브더칠드런이 발간한 ‘체벌 폐지 후 35년 보고서’에 따르면 체벌을 옹호하는 부모의 비율은 1960년대 50%에서 2010년 10% 이하로 떨어졌다. 체벌이 이뤄지는 가정의 비율도 법 시행 이전인 1970년대 50%에서 1980년대에는 30%로 감소했고, 2010년 조사에서 10% 초반까지 떨어졌다.

‘아동 체벌 금지를 위한 글로벌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2020년까지 전세계 60개국이 스웨덴을 따라 체벌금지법을 시행했다.

한국은 올해 들어서야 첫발을 떼며 61번째 참여국이 됐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친권자의 자녀 징계권 조항을 삭제한 민법 개정안을 의결하면서다. 1958년 제정민법 때부터 포함돼 ‘체벌 허용’ 규정으로 활용됐던 조항이 60여년 만에 삭제된 것이다.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미국·캐나다 “친권보다 아동 권리가 우선”

미국은 아동학대에 대해 엄격한 법적 보호 체계를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다. 그 배경에는 강력한 국가 개입이 있다.

1974년 아동학대 방지 및 치유법(CAPTA)을 제정해 학대와 방임 등 위험에 처한 모든 아이를 보호해야 할 국가와 사회공동체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사회공동체 전체가 아동학대를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신고도 활발하다. 예컨대 교사와 의사는 아이가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거나 청결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신고해야 한다. 13세 미만의 아동이 보호자 없이 집에 혼자 남아있어도 신고 대상이다. 주별로 처벌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신고 의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Best Interest of the Child)이란 원칙도 확고하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친권보다 아동을 보호하고 심리를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문제가 드러난 부모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국가가 나서서 친권을 박탈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친권에 막혀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하는 한국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아동학대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2세가 되기 전까지는 보호자 없이 집에 있거나 바깥에 나갈 수 없고, 신고가 접수되면 아동보호법에 따라 부모 동의 없이도 조사를 시작할 수 있다. ‘아동학대 신고 의무법’에 따라 학대가 의심될 땐 누구든 신고해야 하고 위반할 경우 처벌받는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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