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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폭설 속 배달 주문은 살인" 여론이 부른 초유의 셧다운

중앙일보

입력

“수당 더 줄 테니 제발 배달 좀….”

많은 눈이 내린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배달원(라이더)으로 일하는 A씨(31)는 한 치킨업체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A씨는 “시간당 2만원을 제시받았다”고 했다. 평상시의 2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A씨는 “폭설 때문에 배달업체들이 서비스를 중단하자 점주가 라이더에게 따로 연락한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A씨는 배달을 하지 않았다. 대형 배달업체들의 배달 중지 결정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배달업체들이 폭설을 이유로 배달을 중지한 김에 푹 쉬었다”면서도 “다른 몇몇 라이더들은 일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폭설 속 배달은 살인” 비난에 초유의 배달중지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 요기요 등 배달업체들은 이번 폭설에 서비스를 일시 중단했다. “폭설 속에 배달주문은 살인 행위”라는 여론의 영향이 컸다. 여름 폭우 때나 혹서기에 배달료가 1.5배 급등하거나 산발적인 배달 중지가 있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수도권 대부분 지역에서 공식적인 배달 중지 사태가 발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업체들은 12일 오후 수도권 지역 배달원들에게 "기상 악화로 인한 배달 종료"를 공지했다. 배달의민족 측은 "방한 장비를 착용하고 눈길 운행 시 안전에 더욱 유의하시기 바란다"는 문자를 보냈다가 20분 뒤 "라이더님의 안전을 위해 배달을 잠시 중단한다"고 재공지했다. 쿠팡이츠와 요기요도 비슷한 시간대에 서비스 중지를 배달원들에게 알렸다. 바로고·생각대로 등 배달대행업체 역시 지역 거점의 요청을 받아 대부분 지역의 배달을 중단했다.

대형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배달 중지를 결정하면서 눈길 배달 사고의 위험은 줄어들게 됐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일부 상점주들이 평소보다 높은 시급을 제시하며 배달원을 고용했다. 배달은 멈췄지만, 주문은 멈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달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 측은 “대형 배달업체가 주문부터 받지 않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설이 내린 날 도로 위에 서 있는 오토바이. 라이더유니온 제공

폭설이 내린 날 도로 위에 서 있는 오토바이. 라이더유니온 제공

익명을 요구한 배달업계의 한 관계자는 “배달업체가 그동안 폭우나 폭설에 배달원들을 내보내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여론을 의식해 배달을 멈췄더니 일부 자영업자들이 항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몇몇 배달업체와 지점들이 자영업자의 무리한 요구에 응하다 보니 ‘폭설 배달’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배달업체, 여론 눈치만 봐”

일부 배달원들은 배달업체의 경쟁이 불러온 ‘눈치 경영’을 지적했다.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는 "일부 지역은 중지 공지가 늦었다. 이미 만들어진 음식은 배달해야 하는 구조라 폭설 운행을 한 라이더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한 배달대행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 일부 지역 배달센터는 본사에 배달 중지 요청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배달원을 내보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6일 라이더유니온이 발표한 긴급성명서. 라이더유니온 제공

지난 6일 라이더유니온이 발표한 긴급성명서. 라이더유니온 제공

라이더유니온 측은 "이번 폭설에서 배달 중지 조치가 그나마 빨랐던 배경은 '폭설 배달이 위험하다'는 여론 덕분"이라고 했다. 지난 6일 폭설 때 라이더유니온은 긴급성명서를 내고 "눈 속 배달은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엔 배달대행업체들은 서비스를 지속했고 일부는 프로모션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라이더 유니온 관계자는 "12일 폭설에도 다음날 빙판길이 남아있었지만, 대부분 배달업체가 곧바로 서비스를 재개했다"고 했다.

라이더유니온과 배달업 종사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안전 장비 착용 의무화, 수백만 원에 달하는 보험료 구조 등 업계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폭설에서 조성된 여론이 배달원들의 근무 여건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정도 눈에 왜 배달 안 하나" 항의도

배달업계는 배달업계대로 고민이 많다. 한 관계자는 "일부 가맹점주들의 요구 때문에 배달업체들이 곤란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 배달 대행업체 관계자는 13일 "지난주와 어제 폭설에 '배달 중지' 공지를 했는데도 여러 점주가 배달 요청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지역에는 눈이 덜 오는데 왜 배달을 안 하냐는 민원이 많았다"고 했다. 배달업체로서는 고객인 점주들의 요구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지난주부터 욕설을 섞어가며 항의를 한 식당과는 결국 계약을 끊었다"면서 "우리도 배달해야 돈을 버는 구조다. 하지만, 기사님 안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배달 노동자가 교통사고가 나 사고를 처리하고 있다. 뉴스1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배달 노동자가 교통사고가 나 사고를 처리하고 있다. 뉴스1

라이더유니온의 관계자는 "일부 자영업자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가 있다. 다만, 근본적으로 대형 배달업체가 주문부터 막아줘야 해결될 일"이라고 말했다. 배달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대형 배달업체가 책임 있는 대응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배달 대행업체를 이용하더라도 결국 주문은 대형업체를 통한다. 결국 대형업체가 책임감을 가져주지 않으면 라이더들은 계속해서 안전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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