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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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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1. 당혹
K1: 중앙지검이 아니에요. 양식도 관인도 어뜩하죠
S1: 과장님께 보고 드리세요
K1: 과장님도 보시고 걱정하심
K2: 진상조사단이 검찰조직이 아니라 문제가 되고 있겠네요
K1: 글고 긴급대상이 피의자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중이세요
K1: 과장님은 긴급미승인하고 법무부장관직권으로 거는쪽 얘기하시고

죄악 둔감화 보여준 불법 출금 #분노는 사주한 권세가로 향해야 #단죄 없으면 ‘악의 분업화’ 지속

#2. 불안
K1: 혹시 기자전화오믄 대변인실번호 3009 알려주믄되나? 모르는버노저나받지마라는데 내 업무폰은 죄다 모르는버노가와성
K1: 대검진상조사단에서 요청왔는데 승인요청도 그렇게했는데
Y: 거긴 수사권 없다고 막...
K1: 검찰내부에서 동부지검으로 하려는듯
K1: 과장님이 모르는버노받지마라고
Y: 기자=무서운 놈들...

#3. 짜증
K1: 정책보좌관 한분계속와서 얘기하는데 엄청시끄럽고 진짜 별루야
S2: 검사님이셔 글고엄청 염탐해
K1: ○○ 자기네 문제생길까봐
S2: 우리는 늠 힘이 없어
Y: 계장님 어제 잠 못잔거 아니에요?
K1: 사무실서 밤꼴딱새써영 과장님 신계장님 같이
Y: 헐... 그 인간 하나 땜에..??
K1: 어제 아침에 세수한 그대로 냄새나 죽겠어여

#4. 안도와 기대
K1: 낼부터 더바빠질듯 ㅜㅜ
L: ㅋㅋㅋ 장관님이 금일봉줄듯 발빠른대처!!
K1: 나갔으면 우리가 다뒤집어쓸뻔
L: 위법성 논란이고 나발이고 놓쳤으면 간담이 서늘한데여
L: 출입국 창설이래 젤 핫한거같은데 그래도 칭찬이니 다행
K1: 잠잠해지는날 술한잔해요
L: 네네 ㅎㅎㅎㅎ 좀만 더 버팁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불법 출국금지 공익신고(국민권익위에) 서류에 들어 있는 관련자들의 메신저 대화다. 신고자는 김 전 차관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서류에 적었다. 나도 그렇다. 김 전 차관이 죄를 저질렀다면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를 비호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법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 전 차관에게 가해진 불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법무부 출입국 관리 직원들의 메신저 대화는 당혹, 불안, 짜증, 안도로 흐른다.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 소속 검사의 긴급 출국금지 요청에 하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위법성도 인식했다. 이후엔 불안감을 드러냈다. 잘못에 가담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아니다.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뒤는 짜증이다. 무리한 일을 시키고선 감시까지 하는 윗선에 대한 불만, 애초에 이 사건 출발점이 된 김 전 차관에 대한 원망이 표출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힘이 없다’는 합리화를 시도한다. 종국엔 지시 이행 완수에 대한 안도와 보상에 대한 기대가 나타난다.

많이 본 모습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당장 떠오른다. 영문도 모르고 경쟁 조직 습격에 나선 조폭 행동대원이 등장하는 드라마 장면도 스쳐 간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동원된 이들도, 한밤에 원전 관련 문서를 무더기로 폐기한 공무원들도 비슷한 의식의 흐름을 가졌을 것이다.

직업윤리와 준법정신에 눈감은 법무부 직원들에게 화가 난다. 그런데 마냥 미워할 순 없다. 분노는 이들을 ‘악의 분업화’ 과정에 몰아넣은 검사와 법무부 고관대작 또는 그 위로 향해야 옳다. 대화방 속 직원들과 달리 그들은 검찰 조사도 받지 않았다. 불법 원청업자들이 권세를 계속 누린다면 밥을 담보로 악을 강요하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를 악에서 구할 수 없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