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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지지자 소동으로 한국 외교가 골치 아파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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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6일 미국 워싱턴에선 트럼프 지지 폭도들이 의사당에 난입한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많은 현지 언론에는 똑같은 논조의 기사가 실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구상 중인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가 필요한 곳은 세계가 아닌 미국"이라고.
 이번 의사당 난입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치명상을 입은 게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다자주의 외교정책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선거 운동 내내 '미국이 돌아왔다 (America is back)'는 구호를 내세우며 세계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강조해 왔다. 주목할 대목은 바이든 외교의 핵심에 반중(反中) 정서가 깔려 있으며, 이를 실현할 핵심 수단이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라는 사실이다.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대목은 이 정상회의가 한국의 국익에도 몹시 중요한 자리라는 점이다. 한국에 있어서 미 의사당 난입 사건은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정상회의는 한국 외교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번 의회 난입의 후유증은 무엇일까.

"미국이 회의 필요하다"란 비판 커져 #초청 대상 등 놓고 처음부터 파열음 #"중국 겨냥한 연대 옳은가"란 비판도 #한국, 미·중 갈등 피할 방패 없어져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
요즘 국제무대의 최대 관심사는 이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였다. 오는 20일 취임하는 바이든은 지난해 3월 포린어페어스에 게재한 '왜 미국이 이끌어야 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이 회의와 관련된 자신의 외교 구상을 밝혔다. 요컨대 미국이 우방국들과 손잡고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비민주적 세력과 싸우겠다는 게 바이든 외교의 핵심 전략이다. 무엇이 비민주적 세력인지는 대놓고 밝히진 않았지만, 이 정상회의가 날로 막강해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바이든이 비록 온건주의자에 시진핑 주석을 잘 알지만,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악화할 대로 악화한 미국 내 반중 감정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결국 바이든은 미국을 중심으로 친서방 국가를 규합, 중국·러시아 등 독재국가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한편 그는 개최 시기에 대해 "취임 첫해에 열겠다"고만 했을 뿐 정확한 날짜를 못 박진 않았다. 하지만 이 회의가 갖는 중요성으로 인해 빠르면 이번 봄에 개최될 거로 관계자들은 전망해 왔다.
회의가 열리면 참가국들은 현재 어떤 위협이 심각한지 분석하는 한편 이를 막기 위한 구체적 대응 방안을 모색할 거로 예상된다. 이번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미 추진 중인 미국의 조치가 있다. 바로 '클린 네트워크 (Clean Network)'다. 이는 화웨이, ZTE 등 일부 중국기업이 생산한 5G 관련 제품이 미국 등 경쟁국들의 민감한 정보를 빼내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 큰 만큼 이들을 퇴출시키겠다는 정책이다.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워싱턴 의사당 건물해 난입, 로턴다홀에서 미국 국기를 흔들며 소동을 피우고 있다.  EPA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워싱턴 의사당 건물해 난입, 로턴다홀에서 미국 국기를 흔들며 소동을 피우고 있다. EPA

들끓는 비판론
하지만 이 정상회의는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심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우선 어떤 나라를 이 회의에 참여시킬 것인지부터가 논란거리였다. 미국은 아직 참여국을 확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올 G7 의장국인 영국이 G7 정상회의에 한국·호주·인도 등 세 나라를 추가로 초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로써 G7을 '민주주의 10개국 (D10) 정상회의'로 확대 개편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D10의 출범은 바이든이 구상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와 궤를 같이한다. 영국이 미국 외교 기조와 발맞춰가며 필요한 일들을 먼저 하곤 했던 전례들로 미뤄볼 때 이번 D10 국가들이 바이든이 구상 중인 정상회의에 초청될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한국의 경우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정상회의에 기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며 참여 의사를 밝힌 상태다.
 비록 D10이 주축이 되더라도 미국은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민주주의 국가들도 부를 공산이 크다. 어느 지역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이들 나라를 빼고 독재주의의 위험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까닭이다.
 반면 미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터키·남아공·폴란드·헝가리 등의 초청 여부를 놓고 고심해 왔다. 비록 안보상 중요한 파트너임은 틀림없지만 언론 통제 등 권위적 부분이 적잖아 모범적인 민주국가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탓이다. 여기에 해당한 나라로서는 회의 초청을 받느냐의 여부가 무척 중요한 일이 됐다. 이 정상회의에 초청받지 못하는 나라에는 비민주적 국가라는 낙인이 찍히는 셈이 되는 까닭이다.
이밖에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 미국의 중동 내 전통적인 우방국들 역시 조바심내긴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의 경우 종교적 이유로 남녀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을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해 초청할 경우 적잖은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중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벌주기 위해 거창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온당하냐는 비판도 거세다. 독재와 인권 유린이 판치는 남미 및 아프리카 국가들도 수두룩한데 오로지 중국만을 타깃으로 한 국제적 연대를 구성하는 게 온당하냐는 주장에는 해명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1월 6일 트럼프 지지세력이 워싱턴 의사당 건물에 난입해 소동을 일으키자 의사당 내 의원 및 직원들이 의자 밑으로 숨고 있다. AP

1월 6일 트럼프 지지세력이 워싱턴 의사당 건물에 난입해 소동을 일으키자 의사당 내 의원 및 직원들이 의자 밑으로 숨고 있다. AP

골치 아파진 한국 외교
이런 적잖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가 여간 요긴한 행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격심한 미·중 간 갈등 사이에 낀 한국으로서는 잘 만하면 미국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중국의 반발도 적당히 피해갈 수 있는 묘책이 이 회의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바이든은 대선 승리 후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미동맹은 인도·태평양 안보와 경제의 린치핀(핵심축)"이라고 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중국 봉쇄가 핵심이다. 결국 한국이 중국 견제의 주축 역할을 해달라는 게 바이든의 주문인 것이다. 하지만 대중 경제 의존도가 유난히 높은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입장이다. 아직 말끔히 풀지 못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사드) 갈등을 통해 한국이 중국의 압력에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미·중 간 싸움이 격렬해지면 한국은 양쪽으로부터 자기편에게 서라는 압력에 시달릴 게 뻔하다. 이런 터라 한국으로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중 메커니즘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게 좋은 전략이었다. 시진핑 정권이 분노할 미국의 정책에 가담하더라도 "전체가 움직이는 데 빠질 수 없었다"는 식으로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내 갈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상회의가 개최되지 않거나 열리더라도 추진력을 잃으면 참여국과의 연대를 통한 중국 제재가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중국이 "제 나라 민주주의부터 챙겨라"고 공세에 나설 경우 미국의 입장도 난처해지게 된다. 트럼프 지지세력의 난입 사건으로 한국 외교로서는 좋은 방패막이를 잃을 처지가 된 셈이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클린 네트워크 (Clean Network)

클린 네트워크란 5G 통신망과 모바일 앱, 해저 케이블, 클라우드 컴퓨터 등 분야에서 화웨이와 ZTE 등 미국이 믿을 수 없다고 보는 중국 기업 제품을 퇴출시키려는 정책이다. 미국은 이들 기업이 중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미국과 서방 경쟁국의 민감한 기업 정보는 물론 안보 기밀까지 빼돌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등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의 사생활과 기업 비밀 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각국 정부와 주요 기업들은 클린 네트워크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클린 네트워크 로고

클린 네트워크 로고

가입한 나라와 회사는 지난해 12월 17일 현재 53개국, 180개 업체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해 10월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한국은 각 업체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현재 국내 통신업체 중 KT와 SK는 화웨이의 5G 제품을 쓰지 않고 있으나 LG U+는 사용 중이어서 미국으로부터 이용 중단 압력을 받아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또 지난해 9월 개인정보 유출과 국가 안보 보호이란 명분으로 중국 모바일 앱인 틱톡과 이를 개발한 모회사 바이트댄스, 그리고 위챗 및 개발사 텐센트의 모든 거래를 금지했다.

중국은 물론 크게 반발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해 12월 클린 네트워크 전략을 겨냥, “이는 협박 무역의 대명사”라며 “미국은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독보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하면서까지 외국 특정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고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