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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대통령이 해야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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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여운형·신익희·조병옥·이기붕·이철승·박종규·정주영·노태우.

연초부터 체육계 선거 열풍 #정책 대결은 없고 비방만 난무 #국민의 건강과 행복 신경써야

한 시대를 주름잡은 우리나라 지도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 그건 바로 스포츠 행정을 총괄하는 대한체육회장을 지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누굴까.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1896~1960)이다. 불법 부정 선거의 주역으로 지목돼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던 비리 정치인이 한국 최초의 IOC위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유학한 덕분에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된 뒤 이듬해인 1953년 IOC위원에 선임됐다.

체육계가 요즘 시끌벅적하다.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는 두 달도 넘게 남았는데 체육계는 연초부터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당장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코앞이다. 오는 18일 모바일 선거를 통해 스포츠 대통령을 뽑는다. 이밖에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대한체육회 가맹 종목들도 최근 선거를 통해 차기 수장을 선출했거나 뽑을 예정이다.

4명의 후보가 출마한 대한체육회장 선거는 이미 과열 양상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을 비롯해 유준상 대한요트협회장, 강신욱 단국대 교수, 5선 국회의원 출신의 이종걸 후보가 출마했다. 우려했던 대로 인신공격과 비방전이 잇따른다. 정책 대결은 온데간데없고 서로 깎아내리기 바쁘다. 스포츠의 최고 덕목은 페어플레이인데 정작 체육계 수장을 뽑는 선거에선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공약은 비슷비슷하고, 흑색선전만 난무한다.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18일 열린다. 왼쪽부터 유준상·이기흥·이종걸·강신욱 후보. [연합뉴스]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18일 열린다. 왼쪽부터 유준상·이기흥·이종걸·강신욱 후보. [연합뉴스]

대한체육회장이 누가 되건 일반 국민은 사실 큰 관심이 없다.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나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시장을 뽑는 것도 아닌데 누가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잖다. 그렇지만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은 오산이다. 대한체육회장은 국민의 건강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연간 40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주무르는 중요한 자리다.

미국의 초등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가방을 운동장 한켠에 풀어놓고 마음껏 뛰어노는 걸로 일과를 시작한다.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면서 에너지를 발산한 뒤 수업종이 울리면 교실로 들어간다. 중·고등학교도 대부분 비슷하다. 여고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광경은 낯선 일도 아니다.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면서 땀을 흘리는 건 이들의 일상이다. 아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자연스럽게 협동하는 법을 배우고 페어플레이의 중요성을 익힌다.

우리나라 청소년은 다르다. 학교에 가면 온종일 교실에서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경우가 다반사다. 고등학생이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노는 경우는 1년에 한 번도 되지 않는다. 학교문을 나서면 학원에 가거나 PC방으로 향한다. 컴퓨터 게임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이 에너지를 발산할 기회가 없다는 이야기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점점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게 되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다. 현실에선 마음껏 뛰어놀 수 없으니 가상현실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강남 대치동에 가장 많은 게 학원 다음으로 정신과 병원이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물론 체육회장이나 체육단체장 한 사람이 이 어려운 숙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라의 체육을 책임지는 스포츠 행정가라면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정부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쳐나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1980년대까지 정치인 출신 체육회장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들고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따라고 독려했다. 그게 체육회장의 가장 큰 임무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수가 목표에 모자라면 책임을 통감한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올림픽 메달 획득이 더는 체육회장의 임무가 아니다. 2021년 체육회장은 국민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힘써야 한다. 청소년들이 스포츠를 통해 공정과 페어플레이의 가치를 익힐 수 있도록 팔 걷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튼튼해지고, 건강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를 접한 사람이라면 술수를 쓰거나 상대방을 비방하지 않는다. 이긴 뒤엔 패자에게 손을 건네고, 졌다면 깨끗이 승복할 줄 안다.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 활동을 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적어도 모니터 뒤에 숨어서 악성 댓글을 양산해내는 키보드 전사가 되진 않을 것이다. 체육회장은 건강한 대한민국을 지키는 파수꾼이 돼야 한다.

정제원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