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인인사이트]기획을 잘 하고 싶다면, 일단 베껴쓰세요

중앙일보

입력 2021.01.13 05:00

업데이트 2021.01.13 10:31

Editors’ Note
필사(筆寫)란 '베끼어 씀'을 말한다.

필사가 취미인 에디터는 필사가 모든 글의 워밍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작이 어렵다면 우선 남이 쓴 글을 옮겨 적는 것부터 해보자. 필사에는 크게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읽은 정보를 오래 기억할 수 있다. 둘째, 구조적 사고를 돕는다. 셋째, 나만의 아카이브를 축적할 수 있다. 아무리 집중해도 금세 사라져 버리는 기억을 구조적으로 잡아 두고 꺼내볼 수 있는 것이다. 기획도 필사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대로, 읽히는 그대로 옮겨 적은 글은 막막한 글쓰기를 조금은 쉽게 만들어 주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문학노트의 일부. 원출처는 소설가 정한아 《달의 바다》 후반부 (사진제공: 손현)

문학노트의 일부. 원출처는 소설가 정한아 《달의 바다》 후반부 (사진제공: 손현)

어쩌다 글쓰기 강연을 할 때마다 묻곤 한다. "여러분, 자주 보시나요? 자주 들으시나요? 자주 읽으시나요?"

그리고 덧붙인다. 보고 듣고 읽는 경험을 자주 하라고. 가끔은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것을 필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쓸 말이 따로 없는데 내 글을 쓰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남의 글을 옮겨 적는 건 쉽다. 필사(筆寫)란 ‘베끼어 씀’을 말한다. 일종의 워밍업이다.

누군가의 글을 필사하는 행위는 내 취미 중 하나다. 필사한 글을 살펴보면 당시 무엇을 주로 읽었는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고민했는지 엿볼 수 있다. 20대 때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문학과 멀어졌다. 환경이 바뀌면서 내가 당장 읽어야 하는 것들의 카테고리도 자연스레 변했다.

이 시기부터는 자기 계발, 처세, 경제, 경영 위주의 글을 접했고, 그렇게 접한 글 중 일부를 베껴 적었다. 필사한 글의 출처를 보면 동아비즈니스리뷰(DBR),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뉴욕타임스 등이 많다. 첫 회사의 퇴사를 고민하던 2014년부터 2015년까지의 메모를 보면, 소위 '퇴사해야 하는 이유', '조직을 떠나야 하는 이유'에 관한 글들도 보인다.

필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3가지  

내가 꾸준히 필사를 해오며 느낀 필사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어떤 글을 한 번 읽고, 그걸 손으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몇 차례 더 읽는 동안 뇌에 좀 더 오래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1천권 독서법》, 《기적을 만드는 엄마의 책 공부》의 전안나 저자는 7년 동안 1,700여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음독과 필사를 병행했다. 그는 눈과 손으로 반복해서 5번 이상 다시 읽기를 통해,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 주기를 철저히 이용해서 단기에 상실되는 기억을 장기 기억 장치로 옮길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2. 구조적 사고를 돕는다.
언어 행위 자체는 고도의 사고력을 필요로 한다. 보고서를 예로 들면, 요약과 목차만 봐도 이 보고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2014년에 호기심으로 주주 연차 보고서와 Form 10-K*의 목차를 옮겨 적은 다음, 이를 토대로 당시 스스로의 상반기 보고서를 따라 적기도 했다.

*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요구하는 연례 보고서로 기업의 재무성과를 종합적으로 요약해준다. 10-K에는 주로 기업 이력, 조직 구조, 임원 보상, 지분, 자회사, 감사를 마친 재무제표 등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Form 10-K 목차 필사 (사진 제공: 손현)

Form 10-K 목차 필사 (사진 제공: 손현)

3. 나만의 아카이브를 축적할 수 있다.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풍경이 있으면 무의식 중에 사진을 찍듯 필사를 하면 그 기록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메모한 글들은 궁극적으로 내 글을 쓰는 데도 대부분 도움이 됐다. 특히 실무자로서 회사 업무를 할 때 기획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필사만 해도 기획이 떠오른다?

매거진 《B》와 퍼블리(PUBLY)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매거진 《B》(이하 B*)의 '서울' 개정판 마감 때다. 2011년 11월에 B가 창간한 후 2020년 말 기준으로 개정판까지 낸 건 '서울' 이슈가 유일하다. 그만큼 서울이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 B는 균형 잡힌 브랜드를 한 호에 하나씩 소개하는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이다. 패션, 라이프스타일, 테크, 도시 등의 영역을 브랜드 관점으로 소개해왔다.

기획 회의를 통해 2016년 '서울' 초판에서 소개한 6개 카테고리(패션, 라이프스타일 & 디자인, 스테이, 뮤직, 다이닝, 커피)를 업데이트하고, 서울의 체질을 보여주자는 의도로 '살기 좋은 도시', '편의성과 쾌적함을 갖춘 도시'를 담은 새로운 섹션을 추가하기로 결정됐다. 전자가 산업의 지형을 보여준다면 신설된 후자는 행정의 지형을 보여준다.

매거진《B》 서울 표지 (사진 제공: 손현)

매거진《B》 서울 표지 (사진 제공: 손현)

나는 후자 쪽을 맡아 에세이, 시장 인터뷰, 기획 기사, 서울의 위상과 인프라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수치(figures)를 준비했다. 기획 기사 아이템을 정하기 전, 편집장은 내게 이렇게 의도를 전했다. "시민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소개해보면 어때요? 그동안 우리 곁에 있지만, 잘 몰랐던 것들도 좋고요." 문제는, 편리한 서비스가 워낙 많은데 그 서비스의 생애주기가 너무 짧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스타트업의 서비스 등 민간 영역은 1~2년 뒤를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마침 피터 W. 페레토가 쓴 《플레이스/서울》 일부를 필사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저자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메가시티가 ‘DHL 물류 네트워크’처럼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배경으로 도시 인프라를 꼽았다. 필사한 글에서 사고를 확장한 덕분에 교통 서비스를 다루겠다는 기획안이 편집장 선에서 통과됐고, 서울의 정교한 교통 시스템과 담당자 코멘트, 관련 수치를 함께 넣는 기획 기사를 마감할 수 있었다.

"서울을 구성하는 개개의 동네들은 살얼음 조각들처럼 서로 붙어 있을 따름이다. 언제라도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기반 시설이라 통용되는 도로와 교량, 옹벽 따위의 매개 시스템 덕분에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홍콩중문대학교 건축과 교수이자 서울에서 5년 동안 머물며 〈플레이스/서울〉을 쓴 건축가 피터 W. 페레토의 글이다. 실제로 서울은 그의 표현대로 '시에나의 캄포 광장'보다는 ‘DHL 물류 네트워크’와 더 공통점이 많은 곳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과 한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동네가 불연속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성장해온 도시이기 때문이다.

- 매거진 《B》 '서울' 개정판 중 Connections, p.79

도시 공간에서 교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김민지 일러스트레이터(AM327)와 협업했다. 손현 에디터가 보낸 컨셉 스케치(상)를 토대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하) (일러스트ⓒAM327, 사진 ⓒ손현) 두 번째는 PUBLY의 뉴스레터(What We’re Reading)*

도시 공간에서 교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김민지 일러스트레이터(AM327)와 협업했다. 손현 에디터가 보낸 컨셉 스케치(상)를 토대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하) (일러스트ⓒAM327, 사진 ⓒ손현) 두 번째는 PUBLY의 뉴스레터(What We’re Reading)*

두 번째는 PUBLY의 뉴스레터(What We’re Reading)* 사례다. 뉴스레터 컨셉이나 형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각 담당자가 번갈아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썼다. 뉴스레터 당번은 매번 빨리 다가왔고, 다른 마감과 겹쳐 있는 중에 딱히 떠오르는 글감마저 없으면 곤란해지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나는 가능한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도록 쓰려는 욕심까지 부렸다.

* PULBY의 뉴스레터는 지난 8월 28일 이후,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잠시 휴재 중이다.

2018년 1월 12일에 발송한 127번째 레터의 소재는 '가상화폐 투기'였다. 비트코인의 엄청난 변동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게 글을 시작하면 좋을까?'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마침 법정스님의 《일기일회》중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 대한 필사를 발견했다. 덕분에 비트코인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그에 대한 나의 욕심, 흔들리는 마음을 먼저 짚는 방식으로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뉴스레터는 여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처럼 필사는 마감에 쫓기는 사람을 구제해주기도 한다.

법정스님의 《일기일회》 중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필사한 기록 ⓒ손현

법정스님의 《일기일회》 중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필사한 기록 ⓒ손현

알아두면 반드시 도움 될 필사 TIP 3

1. 가급적 손으로 직접 쓰자.
물론 요즘은 클라우드로 연동되는 메모 앱, 생각의 구조화를 돕는 다양한 앱을 활용하여 어디서든 손쉽게 모바일 기기로 적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아이폰의 기본 메모 앱을 활용하지만 가끔은 그 메모를 일부러 노트에 옮겨 적는다. 생각이 정리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키보드로 타이핑하거나, 텍스트를 그대로 드래그하여 복사하고 붙여 넣는 행위는 간편한 만큼 기억에서도 빨리 사라질 확률이 높다. 내가 메모장에 이걸 적었나 싶을 정도로 디지털 형식의 메모는 한없이 쌓이는 반면, 물성이 있는 노트는 내 손에 있는 한, 손쉽게 찾아보고 발견할 수 있다. 노트를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그 기록이 디지털 파일처럼 날아갈 일도 없다.

(후략)

*퍼블리 에디터를 거쳐 매거진 〈B〉의 정식 에디터가 되었고, 지금은 토스의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손현 에디터의 글쓰기 노하우는 이어지는 폴인스토리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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