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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녹색 희망 고문’…500일 더 겪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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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찬수
강찬수 기자 중앙일보 환경전문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꺼져가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지난달 29일 국민권익위 중앙행정심판위원회(중앙행심위)가 사업자인 강원도 양양군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은 2019년 9월 환경영향평가에서 부동의 처분을 내렸고, 양양군은 부당하다며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적폐로 규정, 부동의 처분했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되살리고 #4대강 복원 결정도 계속 미뤄 #분칠한 얼굴로 희망만 갖게 해

중앙행심위는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이미 승인한 입지조건을 환경영향평가에서 다시 따진 것이나 환경영향평가서 보완 기회를 더 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양양 지역주민은 환영했지만, 환경단체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정인철 상황실장은 “입지조건을 환경영향평가의 부대조건으로 넣는 것에 사업자도 동의했었고, 보완할 시간을 2년 6개월이나 줬는데도 통과 못 했다”고 반박했다.

환경단체 반발은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청와대가 이 사안에 ‘정치적으로’ 개입했다며 환경단체는 정무수석실에 무더기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중앙행심위가 현장조사에 나서기 직전인 지난해 10월 사회수석실도 아닌 정무수석실 현장점검단이 케이블카 사업자와 비공개적으로 만난 사실이 지역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 소속인 중앙행심위가 청와대 입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환경단체의 시각이다.

설악산 케이블카에 대한 중앙행정심판위원회 결정이 있었던 지난달 29일 정부세종청사 상공에 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이 띄운 애드벌룬이 떠있다. [사진 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설악산 케이블카에 대한 중앙행정심판위원회 결정이 있었던 지난달 29일 정부세종청사 상공에 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이 띄운 애드벌룬이 떠있다. [사진 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문재인 정부도 초기에는 달랐다. 환경부가 구성한 제도개선위원회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오색케이블카 사업을 대표적인 적폐로 꼽았다. 제도개선위는 공정하게 심판 역할을 해야 할 환경부가 2015년 비밀 팀을 구성해 국립공원위원회에 제출할 사업자의 사업심의 보고서 작성을 도왔다고 몰아세웠다. 입장을 바꾼 환경부는 2019년 부동의 결정을 내렸는데, 이번에 다시 뒤집혔다.

아무튼 국립공원·천연기념물·생물권보전지역·유전자보호림·백두대간보호지역 등 설악산의 다섯 겹 보호막이 뚫렸고, 대한민국 어디든 개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처럼 핵심 환경정책이 뒤집혔는데도 정부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박 정부는 ‘산악 관광 활성화’라는 명분이라도 내세웠는데, 문 정부에서는 명분도 철학도 실종됐다. 정인철 실장은 “환경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국립공원도 못 지키면서 그린뉴딜, 탄소 중립이 무슨 소용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정부가 환경을 살릴 것처럼 떠벌여 기대에 부풀게 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루기만 한다는, 이른바 ‘녹색 희망 고문’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터져 나온다.

4대강 복원 공약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는 환경단체 활동가 1인 시위가 이어졌다. 총리가 위원장인 국가 물관리위원회가 금강·영산강 복원과 관련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 데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금강 유역 물관리위원회에서는 세종보 해체, 공주보 부분해체, 백제보 상시 개방을 권고하는 최종 의견을 확정했다. 영산·섬진강 유역 물관리위원회도 죽산보 해체와 승촌보 상시 개방 의견을 채택, 석 달 전 국가물관리위원회로 넘겼다.

문 정부는 2017년 5월 4대강 보 수문개방을 발표하면서 2018년 말까지 보 처리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보다 2년이나 늦어졌지만 결정된 게 없다. 엄동설한 속 1인 시위에는 문 대통령 임기 안에 4대강 복원작업이 시작이나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담겨있다. 환경운동연합 신재은 국장은 “정부가 선거를 의식하는 바람에 환경부의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 구성부터 늦어졌다”며 “4대강 복원은 더는 정쟁 대상도 아닌데 정부가 여전히 눈치만 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관련 일지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관련 일지

문 정부의 눈치 보기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문 정부 첫 환경부 장관이었던 김은경 장관은 국립공원인 흑산도에 공항을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다 이낙연 당시 총리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경질됐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더불어민주당 가덕신공항 추진단장까지 맡았다. 그런 그가 장관이 되면 케이블카나 공항을 막고 국립공원을 지켜낼 수 있을까.

사실 진보 정권이라고 해서 환경친화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경기 부양책으로 골프장 허가를 남발, 수도권 녹지를 훼손해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2004년 11월 환경단체들은 ‘환경 비상시국 회의’를 구성, 서울 광화문에서 장기간 농성까지 했다.

김은경 전 장관은 퇴임 직전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경제성장 정책 이행 방안으로 토건 산업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한 (진보든 보수든) 결국 똑같아지는 것”이라며 “진보 정부에서도 경제 작동구조를 지속 가능한 발전 쪽으로 전환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어느 정부든 개발 사업을 전혀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에게 정정당당하게 설명할 의무는 있다. 개발해야 하면 개발 이유를, 환경을 지키지 못하면 훼손 이유를, 정책이 바뀌면 바꾼 이유를 말이다. 묵묵부답인 이 정부를 보면서 녹색 분칠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뒤로는 표를 얻기 위해 개발사업자를 둘러업는 ‘희망 고문’을 남은 500일 동안에도 계속 당해야 할 것 같아 걱정이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