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검찰개혁 땐 안그러셨잖아요

중앙일보

입력 2021.01.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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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2019년 6월 10일~2020년 10월 13일.’

‘영혼 없는’ 정부가 정인이 놓쳐
면피 급급해 ‘학대호소인’ 취급
검찰총장 징계하던 정력 어디에

짧디짧은 16개월 인생 앞에 가슴이 먹먹하다.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정인이가 세상에 머문 시간이다. 아이가 겪은 고통과 공포까지 떠올리면 숨이 막힌다. 동시대를 산 어른으로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하 20도의 한파 속에도 수백명의 추모객이 정인이가 있는 경기도 양평 공원묘지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크고 작은 책임이 있는 사건 연루자들도 괴로워하고 있다. 언론 보도로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뒤늦게 대기발령 조처된 서울 양천경찰서장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고개를 숙였다. 현장조사를 한 강서아동보호전문기관의 책임자는 “우리도 미안하고 안타깝다. 직원들의 트라우마도 크다”고 말했다. 3차 신고 때 정인이를 진료한 의사는 “살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을 했다”고 토로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어린아이에게 치명적인 학대가 가해졌을 거라 상상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회는 분노한 국민을 달래느라 입법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긴급 분리’ ‘즉시 수사’ 등을 담은 ‘정인이 방지법’이 앞다퉈 만들어졌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불편하기만 하다. 제2, 제3의 정인이를 막을 수 있을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서다. 정인이 이전에 숨지거나 다친 아이가 한둘이었나.

서소문 포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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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중앙일보 기자들과 만난 사건 관계자들도 죄책감에 이어 현실적 한계를 호소했다. 경찰서장은 “현장에서 의심하지 않으면 보고도 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고 했고, 아동기관은 “집 앞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못 들어간다. 우리가 만능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소아과 의사는 “사전 정보도 없이 5분 진료로 학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숨지었다.

악마는 허술한 디테일을 파고들었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거나 한 발짝 앞서나가지 않은 순간이다. 수사기관은 아동보호기관에, 아동보호기관은 의료기관에, 병원은 다시 수사기관에 더 많은 책임과 역할을 요구했다. “양부모라고 이러는 거냐. 지난번에도 학대가 아니지 않았나. 구내염 때문에 잠시 아픈 거다”라는 악마의 항의가 먹혀들었다. 무기력한 ‘협업’은 긴급한 도움이 필요했던 아이를 ‘학대 호소 아동’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선하다는 믿음이 왜 하필 그 순간 거기서 나왔을까.

정인이 사건은 이 시대의 어른과 공직자의 ‘영혼 없음’이 불러온 참극이다. 정인이가 살아 숨 쉬며 남모르게 학대받던 때에도 정부는 대책을 내놓고 있었다. 지난해 6월 다른 아동학대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경찰은 현장에 긴급 출동하는 수준인 ‘코드1’으로 대응 체계를 격상한다고 발표했다. 5단계(0~4) 중 두 번째로 높은 코드를 부여했지만, 석 달 뒤 정인이가 3차 학대 의심 신고로 병원에 갔을 때 경찰은 옆에 없었다. 7년 전엔 ‘3회 이상 아동학대 신고 접수 시 즉시 구속한다’는 ‘삼진아웃제’를 공언하기도 했다. 훗날 경찰도 ‘미봉책’이라고 자인한 제도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에겐 ‘아몰랑 화법’이란 불명예가 안겨졌다. ‘유체이탈 화법’과 함께 박근혜 전 대통령 비판에 쓰이던 표현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경찰의날 행사(지난해 10월 21일)에서 한 연설이 대표적이다. 정인이 사망 8일 뒤에 열린 행사에서 문 대통령은 “위기 아동을 발굴하고 8500명의 재학대 위기 아동을 집중 점검했다”며 경찰의 노고를 치하했다. 행사 며칠 전 언론에선 ‘경찰이 세 차례나 학대 의심 신고를 놓쳤다’고 비판하던 때였다. 대선 후보 시절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서 어린이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공약도, 지난해 6월 9세 의붓아들 학대치사 사건 때 “코로나19로 인해 아동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 아동학대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 만큼 더욱 적극적으로 위기의 아동을 찾아내야 한다”고 한 메시지도 허언이 됐다. 11일 신년사에선 ‘표 안 되는’ 아동을 위한 언급은 아예 사라졌다. 되짚어 볼수록 정부의 무능함에 절망하게 된다.

국민만 보고 간다던 이 정부의 영혼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나. 검찰 개혁이나 원전 가동 중단에서 보인 열정과 추진력이 왜 아이들 문제에선 안 보이나. 검찰총장 축출에 쓴 추상같은 감찰과 징계, 원전중단을 위해 “너 죽을래”라 외치던 장관의 열정이 있었다면 정인이의 해맑은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땐 안 그러셨잖아요”라는 하소연도 못 하고 스러진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김승현 사회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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