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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이명박·박근혜 사면은 야당 분열 노린 불장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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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5일 ‘미국 민주주의의 위험한 순간’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선포되지 않은 쿠데타(undeclared coup d'état)가 시도되고 있다”고 했다. 설마했는데 다음 날 유혈극이 벌어졌다.

통합 실패로 미국 민주주의 위기 #남북대치 한국 통합 더 절실한데 #5년마다 신생국 되는 악순환 반복 #문 대통령은 분열 끝내는 사면을

차기 미국 대통령의 당선 확정을 저지하려는 수천 명의 트럼프 지지자가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것은 쿠데타 시도였다. 헌법의 수호자인 현직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하는 반역자를 “위대한 애국자(Great patriot)”라고 호명한 순간 미국 민주주의는 추락했다.

1831년 프랑스 베르사유 법원 배석 판사 출신 토크빌은 신분 차별이 없는 신대륙의 민주주의에 감탄했다. 동시에 “지나친 자유보다는 폭정에 대해 충분한 보장책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가 더 경계할 대상이다”(『미국의 민주주의』)라고 했다. 놀라운 선견지명이다.

미국의 위기는 세계화 이후 양극화에 둔감했던 워싱턴 주류 정치에 원죄(原罪)가 있다. 백악관의 새 주인 바이든은 빈자(貧者)와 소수자, 흑인의 눈물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눈과 귀, 입이 될 요직은 탐욕스러운 월가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비스트 출신들로 넘쳐난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CEPR)의 제프 하우저는 “바이든의 문제는 로비스트가 되기 전에 알았던 이들을 여전히 로비스트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분열의 시대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삶의 공간, 한반도는 어떠한가. 양극화의 고통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악화되고 있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피케티지수는 진보를 표방한 문 정부 들어 오히려 치솟고 있다. 이 와중에 북한과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도 모자라 남쪽 내부에서도 죽기살기로 싸운다. 고령의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적폐’라는 죄목으로 큰칼을 목에 차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정권을 되찾아 문재인도 감옥에 보내자”며 이를 갈고 있다.

이러니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은 5년 시한부 신생국가로 힘들게 출발해야 한다. 과거 정권 사람들을 하도 내쳐서 인재풀은 완전 고갈 상태다. 무능한 충성파가 요직을 독식하다 보니 문 정부의 외치와 내치 역량은 역대 최저 수준이다. 꽉 막힌 아포리아의 상황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통합을 위해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하자 청와대는 “논의해 볼 수 있다”고 반응했다. 친문 강경파가 “쉽게 용서하면 다시 힘을 길러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김용민 의원)이라며 반발하지만 큰 흐름은 잡혀 가고 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야당을 분열시키겠다는 정치공학적 의도가 들어 있다면 사면 카드를 거둬들여야 한다. 박 전 대통령만 ‘선별’ 사면하겠다는 것도 난센스다. 이 전 대통령의 단죄가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였다”는 친노의 분노에서 비롯된 정치적 탄압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 철학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시절 사형을 선고받은 뒤 매 순간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랐다”고 했다. 유언을 겸한 최후진술에서는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에서 김대중을 구한 것은 미국이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카터 대통령은 레이건 당선자에게 “김대중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다. 레이건은 자신과의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전두환에게 ‘김대중 감형’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해 관철시켰다.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해 전두환·노태우를 사면시켰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용서한 셈이다. 김대중은 취임 이후 분기에 한 번 이상 전직 대통령 내외를 모두 청와대로 초청했다. “사람은 겪어 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전두환 부인 이순자는 토로했다.

김대중이 ‘원수’를 국가원로로 예우한 것은 개인적 해원(解冤)의 차원을 초월한다. 화해와 통합만이 분열된 분단국가를 이끌어 나갈 동력이기에 정치보복을 중단하겠다는 신념의 결과였다. 김대중은 이를 통해 진보와 보수, 영·호남의 화해라는 정치적 신뢰자산을 축적했다. 그래서 노사정 합의를 통해 노동개혁을 하고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통합, 의약분업이라는 난제도 해결했다.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도 국민 통합의 결과였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진 것은 달러가 부족해서도, 첨단 무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내부 통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분단국가 한국에서는 내부 통합이 더 절실하다. 사면이라는 통합의 카드를 정략적 불장난으로 접근하면 공동체가 산산조각난다.

문 대통령은 3년7개월 동안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제는 정권 핵심에서도 “적폐 청산은 업적이 아니다”고 한다. 단 하나의 업적이라도 역사에 남기려면 국민 통합이 절실하다. 사면이 분열과 저주가 아닌 통합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이하경 주필·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