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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몸 필요하나, 정신 중시 ‘신중세기’로 회귀할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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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호 25면

미래 Big Questions 〈25〉 몸의 미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해부학 스케치’(1510 또는 1511). [영국 왕실 소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해부학 스케치’(1510 또는 1511). [영국 왕실 소장]

땅을 두 쪽으로 가르고 귀를 멀게 하는 천둥 번개였을까? 아니면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삼지창이었을까? 1929년 그리스 아르테미지아해협에서 발견된 청동상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제시한다. 오른손에 든 무언가를 던지기 바로 직전 몸의 균형을 잡는 듯한 2500년 된 청동상. 무엇을 던지려 했던 걸까? 만약 삼지창을 던진다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었겠다. 하지만 삼지창이 얼굴을 가리진 않았을까? 반대로 번갯불을 던지는 모습이라면 제우스 신을 표시했을 것이다. 포세이돈 또는 제우스. 사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아르테미지안 청동상의 진정한 의미는 2500년 전 그리스에서 드디어 인간의 몸 자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겠다.

인류 몸, 자신 표현 광고판 역할 #로마 몰락 후 몸보다 정신 중시 #르네상스 땐 몸을 기계로 취급 #AI 등 해결 위해 건강한 몸 필수 #풀수 없는 문제 많은 현실 포기 #사이버세상으로 도피 가능성도

몸이란 무엇인가? 수백만 년 전 맹수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몰래 훔쳐 먹던 고대 인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었겠다. 하지만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며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영장류들과는 달리 엄지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돌과 뼈를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르테미지안 청동상 인간의 몸 완벽 표현

인류의 뇌는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고, 폭발적으로 커진 뇌는 인간을 지혜로운 원숭이, 호모 사피엔스로 격상시켜 준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무슨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까?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해 생각했을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사냥감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들, 아무 이유 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고,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자신의 시작은 언제나 ‘나의 몸’이었다. 방금 먹었는데도 다시 고프기 시작한 나의 배. 며칠 전 사냥하다 찔린 가시 때문에 여전히 아픈 나의 발. 달리는 사슴을 한참 쫓아가면 쿵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나의 가슴. 오랜 시간 동안 인류에게 몸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신호이자 반응일 뿐이었다.

자폐증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로 뽑히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바론-코헨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단순히 커졌다는 사실보다 뇌 특정 영역의 발달이 현대 인류 진화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영역들일까? ‘공감과 분석’ 능력을 제어하는 대뇌 영역들이라고 그는 제안한다. 분석 능력은 현실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너무나 디테일에 집착하게 한다. 반대로 공감 능력은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타인의 생각을 추론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문제 그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공감 능력은 문제를 보도록 하지만, 풀지는 못하는 반면 분석 능력은 문제를 풀 수는 있지만, 보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470~1528)의 ‘부활’(1512~1516), 이젠하임 제단화. [프랑스 알자스,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470~1528)의 ‘부활’(1512~1516), 이젠하임 제단화. [프랑스 알자스,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폭발적으로 발달된 분석·공감 능력은 몸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공감 능력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질문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보이는 것 같이 내 얼굴 역시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을까?’ 예쁘고 아름다운 얼굴이 내 마음에 들기에, 나 역시 타인에게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이고 싶다. 그리고 분석 능력은 이제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연의 변화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수동적 기능을 넘어 의도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미디움으로 진화했기에, 인간의 몸은 인류 첫 캔버스이자 책, 첫 오버더톱(OTT)이자 광고판이었던 것이다.

아르테미지안 청동상이 표현하는 신의 몸은 완벽하다. 실 하나 두르지 않은 신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 무언가는 이제 얼마 후면 신의 절대적인 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완벽한 청동상을 만들어 낸 조각가와 함께 수많은 지성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은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도 육체적이었다. 씨름, 달리기, 멀리뛰기…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김나지온(오늘날 짐)에서 시간을 보냈고, 땀으로 범벅이가 된 몸을 씻기 위해 공동 목욕시설들이 등장한다. 올림픽 게임이 그리스에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건강한 몸과 아름다운 육체에 페티시즘 수준으로 집착한 고대 그리스 문명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로마제국은 ‘mens sana in corpore sano’(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 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세상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지중해 주인이 된 로마는 선언한다. 로마제국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몸을 가졌다고. 로마의 몸은 무적이기에 영원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적의 로마제국 역시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고, 기원후 410년 수도 로마마저도 서고트족에게 함락당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묻기 시작한다. 영원할 것이라는 로마가 멸망한다면,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은 허상이고 거짓이지 않았냐고?

아르테미지안 청동상(기원전 480년께).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아르테미지안 청동상(기원전 480년께).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스스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우리 인간. 거짓은 아니었지만, 잘못된 해석이었다는 변명이 힘을 입는다. 영원한 로마는 육체적 존재가 아니었다. 몸은 병들고, 죽고, 썩어버린다. 육체적 로마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로마의 진정한 모습은 몸이 아닌 정신이었다. 병든 몸이 숨을 거두는 순간 자유로워지는 영혼. 눈에 보이는 물질적 로마제국이 멸망해야만 진정한 제국, 바로 영원한 영적의 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무너진 한(漢)나라가 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롭게 통일된 제국으로 되돌아온 중국과는 달리 비슷한 시기에 무너진 로마는 영원히 되살아나지 않았다. 물질적 제국이 다시 부활하지 않았기에,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몸이 아닌 정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메시아. 하지만 예전과 동일한 몸은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기에 의심 많은 사도 토마는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 확인하려 했던 것 아닌가! 로마제국의 부활 역시 물질적 부활이 아닌 정신적 부활이어야 한다고 중세인들이 믿기 시작한 이유다.

르네상스 예술가들, 몸을 조각하기 시작

십자군전쟁을 통한 다른 문명과의 충돌,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문명의 몰락 그리고 1453년 고대 로마제국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비잔틴제국의 몰락은 서유럽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다. 바로 몸의 귀환이었다. 르네상스는 몸의 재발견이기도 했기에 예술가들은 다시 인간의 몸을 그리고 조각하기 시작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이 보여 주는 인간의 몸은 더 는 성스럽지도, 신비하지도 않았다. 마치 톱니바퀴와 지렛대로 가득간 기계같이 인간의 몸 역시 부품으로 가득한 또 다른 하나의 기계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몸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포스트팬데믹 시대의 위기, 인공지능 그리고 기후변화. 미래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더 많은 물리적 노력이 필요하기에,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몸의 헤게모니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미래 역시 가능하다.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 수 없는 문제로 가득한 세상.

더는 단순한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문제 풀기 그 자체를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다. 기후변화와 불평등, 강대국들의 패권 싸움과 글로벌 IT 기업들의 ‘감시자본주의’…어차피 개개인이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문제를 무시하거나, 그런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사이버세상에서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몸의 미래는 더는 팩트와 몸이 아닌 정신과 믿음이 다시 중심이 될 ‘신중세기’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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