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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에 최후통첩 판결” 꽁꽁 얼어붙는 한·일 관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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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호 03면

위안부 배상 판결 파장

남관표 주일대사가 8일 한국 법원의 위안부 할머니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남관표 주일대사가 8일 한국 법원의 위안부 할머니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8일 법원 판결은 피해자들에게는 사법 정의가 실현됐다는 의미가 있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에 대해선 사죄하면서도 ‘배상’이란 개념은 끝까지 거부해 왔다. 하지만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를 풀어가야 할 한국 정부 입장에선 또 다른 큰 숙제를 안게 됐다. 일본은 당장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민간기업 배상 판결보다 큰 파장 #대사 교체 국면 전환 상황서 충격 #정부, 외교적 해결 여지 적어 고민 #스가 “국제법 위반, 소송 각하돼야” #교도통신 “한·일 관계 험악해질 것”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국제법적으로 통용되는 ‘주권 면제’ 개념을 배척했다. 이는 한 나라의 법원이 다른 나라 정부의 주권 행위에 대해 재판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는 규범인데, 법원은 “주권 면제론은 그 뒤에 숨어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게 아니다”고 판시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그동안 피해자들이 일본과 미국 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는데 이번에 한국 내에서 구제가 된 것”이라며 “공식 법정에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된 건 처음이라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 소송의 피고가 일본 기업이나 개인 등 민간이 아니라 일본 정부라는 점은 한·일 관계에 미칠 파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사법부 판결은 외교의 영역과 달리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며 “상대국 정부를 대상으로 사실상 최후통첩하는 판결이 나온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외교적으로 뭘 해볼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판결이 나오기 직전 한·일 정부는 강창일 주일대사와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 임명을 공식 발표했다. 양국이 서로 대사 교체를 통해 국면 전환을 꾀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직후 사법부발 충격파가 닥친 격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런 분위기 탓인지 외교부는 판결이 나온 지 6시간30분이 지나서야 공식 입장을 냈다. “정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입장에선 쉽사리 다음 수를 둘 수 없는 정부의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여기에 오는 20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출범한다는 점도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이날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이는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의 적용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5년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의 숨은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특히 당시 합의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사안이었다. 당시 부통령인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국무부 부장관이었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미국은 한·일 위안부 합의를 평가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판결로 ‘한국이 또 문제를 들고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일본도 이런 상황을 활용해 역공을 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본 정부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국제법상 통용되는 ‘주권 면제’ 원칙을 위반한 “상식적이지 못한 판결”이라면서다. 특히 민간 기업이 아닌 일본 정부를 상대로 판결이 내려졌다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는 2018년 강제징용 배상 판결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도 이날 회견에서 “국제법상 주권국가는 타국에서 재판받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이번 소송은 각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정부에 국제법상 위반을 시정하는 조치를 취하길 강하게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도 이날 오전 판결 직후 남관표 주일대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해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도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교도통신은 “한·일 관계가 한층 험악해질 전망”이라며 “충격은 일본 민간기업에 배상을 명령한 징용 소송을 웃돈다”고 전했다. 요미우리 신문도 “강제징용 노동자 소송 문제 등으로 ‘전후 최악’이라는 양국 관계가 한층 더 위기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이번 판결로 ‘한국은 상식이 안 통하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혐한파뿐 아니라 일본 대중들의 반한감정까지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지혜·박현주 기자, 도쿄=이영희·윤설영 특파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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