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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 민법 조항 63년 만에 삭제…잇따른 학대 사건이 ‘신중론’ 꺾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랑의 매’의 구실로 활용됐던 민법 915조 친권자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는 법안이 8일 오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민법 제정 이후 한 번도 개정된 적 없던 규정이 63년만에 삭제됐다.

민법 제915조(징계권)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

이 조항은 “때려서라도 자식을 바르게 키우겠다”는 말이 통하던 1958년 만들어졌다. 법원에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조항을 부모의 체벌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로 인정했고, 최근 아동학대 범죄 사건에서도 가해 부모들이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여행가방 아동학대 사망 사건’이나 ‘경남 창녕 여아 학대사건’에서 부모들은 모두 “훈육을 다소 과하게 했을 뿐”이라며 이 조항을 앞세웠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7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인이 입양 절차를 진행한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를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시민단체 회원들이 7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인이 입양 절차를 진행한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특별감사를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국제 기구인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선 2011년과 2019년 ‘대한민국 국가보고서’를 통해 “모든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한국의 가정, 학교 및 대안 돌봄 환경에서 체벌이 여전히 성행한다는 과거 우려사항을 다시 확인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과 유럽 35개국 등 선진국에서는 아동에 대한 모든 체벌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다.

하지만 쉽게 고치긴 어려웠다. 부모의 자녀 훈육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여론도 많아서였다. 2019년 리얼미터·CBS 여론조사에서 민법의 징계권을 없애는 것에 대해 47% 응답자가 반대했다. 징계권 조항 삭제에 찬성하는 응답(44.3%)보다 많았다. “자녀 훈육을 위해 현실적으로 체벌은 불가피하다”는 게 이유였다.

정부, 1년 반 전까지 신중론…아동학대 사건으로 급선회

정부는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징계권 삭제를 반대해왔다. 2019년 9월 국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법무부 전문위원은 “징계권은 부모가 양육을 위해 활용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체벌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본심의에서도 법무부는 “징계권이 아동에 대한 체벌, 학대, 폭력 등을 허용하는 근거는 아니다”며 개정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지난해 들어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 법무부는 8월 징계권을 삭제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여행가방 아동학대 사망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한 게 영향을 줬다. 앞서 지난해 4월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는 법무부에 “민법의 징계권을 훈육으로 대체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여전히 징계권에 체벌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은 맞지만, 오해하고 오용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있다”며 입장 변화 이유를 밝혔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아예 법에서 들어내서 그 의미를 선명하게 하자는 취지”라는 설명이었다.

국회에선 두 달 전 논의…공수처 대립에 지연

21대 국회에서도 민법의 징계권을 고치려는 움직임은 계속됐다. 신현영·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법에서 징계권을 삭제하자는 법안을 냈다. 징계권 대신 훈육권을 새로 만들자는 법안(황보승희 국민의힘 의원·전용기 민주당 의원)과 폭력적인 징계 방법을 금지하는 법안(박주민·진성준 민주당 의원)도 각각 발의됐다. 정부도 지난해 10월 13일 징계권을 삭제하는 법안을 국회로 보냈다. 이날은 정인이가 사망한 날이었다.

민법 915조 징계권 개정 관련 주요 법률안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민법 915조 징계권 개정 관련 주요 법률안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본격적인 심사는 지난해 11월 26일 열렸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날 법안소위 회의에서 “지금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징계가 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에 맞지 않다”며 폐지 의견을 냈다. 법무부도 징계권을 지우고 훈육권을 새로 만드는 절충안에 대해 “해석상 불필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기영 전 차관)며 폐지론에 힘을 실었다. 여야 의원들의 입장도 대체로 ‘폐지론’에 기울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선 최종 의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야당이 요구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법사위 출석을 여당이 반대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회의에 불참하면서다. 당시 회의를 진행한 백혜련 법안소위 위원장(민주당)은 “야당 위원님들이 없으셔서 의결은 좀 더 뒤로 미루고 계속 심사하는 것으로 하겠다”며 회의를 끝냈다. 이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난해 12월 정기국회에선 이 법안이 다시 논의되지 못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양부모의 학대로 짧은 생을 마감한 만 16개월 정인(입양 전 이름)이 사건을 애도하며 "정인아 미안해"라고 적힌 종이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양부모의 학대로 짧은 생을 마감한 만 16개월 정인(입양 전 이름)이 사건을 애도하며 "정인아 미안해"라고 적힌 종이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다시 한 달 넘게 방치됐던 이 법안 논의를 촉진 시킨 건 지난 2일 다시 조명된 ‘정인이 사건’이었다. 국회의원들도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를 이어나갔다. 지난 6일 여야는 ‘정인이 방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발표했고, 7일 법사위 법안소위 회의에선 단 두 시간만에 처리됐다. 이번에도 법안을 바꾼 건 심도 깊은 논의가 아니라 잇따라 발생한 사건이었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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