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통령을 '폭도 수장' 전락시킨 트럼프 한마디 "의회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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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지지자들 앞에서 "의회로 가라"고 연설했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지지자들 앞에서 "의회로 가라"고 연설했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례 없는 대선 불복이 결국 폭력 시위대가 '민주주의의 전당'인 미 의회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 제3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미국의 심장 워싱턴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트럼프 지지자들, 바이든 확정 회의장 급습 #4시간 의회 점거, 의장석서 발 올리고 조롱 #사망·폭력사태에 공화당 '동지'도 등 돌려

6일(현지시간) 4시간에 걸친 트럼프 지지자의 상원과 하원 점거를 미국 언론은 "쿠데타 시도"(니콜라스 크리스토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폭동"(제이크 태퍼 CNN 앵커)으로 규정했다. 친트럼프 성향의 폭스뉴스까지 "1814년 미국과 영국 간 전쟁 때 의회가 불탄 이후 정부기관에 대한 가장 중대한 침입"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의회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를 공식 확정하는 상·하원 합동 회의가 열렸다. 회의 시작 후 1시간이 지난 오후 2시께 의사당 밖에 있던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넘어 내부 진입을 시도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6일 미국 의회를 급습해 내부를 4시간 동안 점거했다. [EPA=연합뉴스]

트럼프 지지자들은 6일 미국 의회를 급습해 내부를 4시간 동안 점거했다. [EPA=연합뉴스]

본회의장 봉쇄했다가 시위대에 내줘 

턱없이 부족한 경찰 병력을 물리치고 시위대는 완력으로 문을 열고, 유리창을 부순 뒤 실내로 진입했다. 수백 명이 뚫은 길을 따라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경호국 호위를 받으며 급히 회의장을 떠났다.

상원과 하원 본회의장은 들고나지 못하게 봉쇄됐다. 총기 소지범이 나타났을 때 대응 수칙이다. 시위대는 각목과 쇠파이프, 야구방망이 등을 들고 있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시위대가 상원 본회의장 진입을 시도하자 의회 경찰은 나무 궤짝으로 문을 가로막고 권총을 꺼내 '침입자'를 조준했다.

하지만 버티지 못하고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전원 대피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의회 직원이 각 주 선거 결과를 담은 상자를 잊지 않고 챙겨 나왔다. NYT는 "자칫하면 폭도들에게 선거 결과를 도둑맞을 뻔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지지자가 6일 상원 본회의장에 난입해 조금 전까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앉아있던 의장석에 앉았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지지자가 6일 상원 본회의장에 난입해 조금 전까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앉아있던 의장석에 앉았다. [AFP=연합뉴스]

상원의장석 점거, 하원의장실서 물건 훔쳐 

시위대는 상원과 하원, 두 건물을 잇는 돔 형식 건물인 로툰다를 활보했다. 조금 전까지 펜스 부통령이 앉았던 상원의장석을 점거하고, 펠로시 하원의장실에서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공권력을 조롱했다. 의원 사무실에 걸린 그림 등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폭스뉴스 영상에 따르면 시위대는 의회 안에서 "그들이 선거를 훔쳐갔다"고 외쳤다. 한 명이 "누구의 집"이라고 선창하면 군중이 "우리의 집"이라고 답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이건 혁명"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의회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의사당 안에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온 35세 여성이 숨졌다. 의회 안팎에서 모두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3명의 사인은 '의료상의 문제'로만 알려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6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6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압박에 트럼프 "우리가 이겼지만, 그만 귀가하라" 

의회가 무법천지가 되자 바이든 당선인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오후 4시께 "이 혼란을 이젠 끝내야 한다"면서 "폭도들은 뒤로 물러서서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지금 전국 방송에 나가 이 점거를 끝내라고 말하라"고 압박했다. 바이든은 "우리 민주주의가 전례 없는 공격을 받고 있다"면서 폭력 시위대가 의회와 국민의 대표자, 임무 수행 중인 경찰과 공무원, 법치주의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바이든 담화가 나온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올린 사전 녹화 영상에서 시위대에게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압승했는데, 그것을 도둑맞았다"면서 선거가 조작됐다는 잘못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워싱턴DC는 주 방위군 1000명 등 공권력을 추가로 투입해 시위대를 의사당 밖으로 몰아냈다. 의회 내부가 정리된 건 오후 6시께였다.

트럼프 대통령 낙선 이후 워싱턴에서 대선 불복 시위가 열린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백악관 근처 광장 등 실외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열린 지난해 11월과 12월 시위와 달리 이번 집회가 폭력 사태로 치달은 배후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집회를 '미국을 구하는 행진'으로 정하고 지지자들에게 "의회로 가라"고 부추겼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집회를 '미국을 구하는 행진'으로 정하고 지지자들에게 "의회로 가라"고 부추겼다. [EPA=연합뉴스]

트럼프 "의회로 가 힘을 보여줘야" 부추겨

이날 낮 12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앞 공원에서 한 연설은 지지자들에게는 '돌격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구하는 행진(Save America March)'이라고 적힌 연단에 올라 여러 차례 의회로 가서 강하게 맞서라고 부추겼다.

그는 "우리는 의회로 갈 것이다. 가서 용감한 의원들에게는 용기를 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격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약해서는 이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 힘을 보여줘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며 사실상 시위대의 의회 난입을 유도했다. 트럼프 연설 2시간 뒤 시위대는 의사당을 '접수'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의회 점거는 의회 내 트럼프 지지 세력을 이탈시켰다. 이날 오후 8시 재개된 회의에서 바이든 승리에 반대하겠다고 공언해왔던 공화당 의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반대 입장을 철회했다.

상원에서 열린 애리조나주 선거 결과 확정 표결에서 찬성은 93표, 반대는 6표 나왔다.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은 "당초 13명이 바이든 승리에 반대하겠다고 말했는데, 6명으로 줄었다"면서 "오늘 일을 계기로 7명이 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켈리 레플러 공화당 의원.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켈리 레플러 공화당 의원. [AP=연합뉴스]

트럼프의 폭력 조장에 공화당 의원도 등 돌려

이날 조지아주 결선 투표에서 패배가 확정된 켈리 레플러 공화당 상원의원은 "오늘 아침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선거 결과 승인에 전적으로 반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사건이 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면서 "양심적으로 선거인단 인준에 반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레플러 의원은 지난 4일 트럼프 대통령의 조지아주 지원 유세 무대에 올라 "1월 6일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에 반대하겠다"고 공언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며 격려했다.

공화당 소속 스티브 데인스 상원의원(몬태나)과 마이크 브라운 상원의원(인디애나)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공화당 중진인 랜드 폴 상원의원(켄터키)은 "헌법 제정자들은 주가 승인한 선거 결과를 뒤집을 권한을 의회에 주지 않았다"면서 "의회가 선거 결과를 번복하면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장치인 선거인단 제도를 영원히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최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끝난 것은 끝난 것"이라며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가 대통령과 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당선 반대를 주도했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은 당초 애리조나를 비롯해 6개 주 선거 결과에 반대하겠다고 밝혔으나, 애리조나와 펜실베이니아 2개 주로 줄였다. 조지아·네바다·미시간·위스콘신주 결과에 대한 이의제기는 포기했다.

상·하원 합동 회의는 당선인을 확정하는 마지막 대선 절차다. 이날 의회가 우여곡절 끝에 바이든 승리를 공식화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의 '반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CNN은 "오는 20일 바이든 당선인 취임식까지 시위대의 저항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의회 경찰이 하원 본회의장에 침입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의회 경찰이 하원 본회의장에 침입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임기 13일 남은 트럼프, 탄핵론까지 나와 

이에 임기가 13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더 이상 혼란을 막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하원 민주당 의원 일부에서 시작된 탄핵 제안에 에드 마키 상원의원(매사추세츠), J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와 공화당 소속 필 스콧 버몬트 주지사도 합류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ABC뉴스는 "이날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난 뒤 트럼프 행정부 내각과 최측근 사이에서도 트럼프를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탄핵 절차나 형사 기소를 통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테펜 슈미트 아이오와주립대(정치학)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역설적으로 오늘 트럼프주의는 크게 힘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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