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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퇴계 제자 309명 중 혼자 도산서원에 모셔진 조목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1) 

퇴계 이황은 309명의 제자를 길렀다. 문도록에 이름이 전하는 숫자다. 이들 중 덕망이 높은 이를 흔히 고제(高第)로 불렀다. 대표적인 제자 중에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이 있다. 퇴계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제자 중 유일하게 종향된 이다. 월천은 제자 중 특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그의 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월천선생문집.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월천선생문집.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월천은 도산서당과 지근거리인 예안 출신이다. 그는 수시로 퇴계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고 선생을 도와 역동서원을 세우는데 힘을 보탰다. 1570년 11월 퇴계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곁에서 약 시중을 들었다. 퇴계는 다음 달 세상을 떠난다. 그는 슬픔 속에서 장례를 주선해 이듬해 2월 선생을 건지산에 안장했다. 월천은 1572년 4월 동문들과 모여 도산서당 위에 선생의 위패를 모실 상덕사를 세울 것을 논의했다. 이어 5월에는 선생의 일생과 학덕을 상세히 기술한 『퇴계선생언행총록』을 짓고 동문들과 논의해 『퇴계연보』의 초고를 만든다.

1576년에는 그가 건립을 주도한 도산서원이 완공돼 봉안제문을 지었다. 또 그는 1584년 『퇴계선생문집』편찬을 시작해 1600년 간행 임무를 완수한다. 이에 비해 제자 중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모두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느라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또 이들은 초기 스승의 문집을 꾸미는 데도 참여하지 않았다. 월천은 이렇게 퇴계학단의 비서실장 같은 역할을 해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월천서당 앞에 선 후손들. 가운데는 조동주 월천 16대 주손이며 조진극 문중 총무(오른쪽)와 조병기 횡성 조씨 종친회장. [사진 송의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월천서당 앞에 선 후손들. 가운데는 조동주 월천 16대 주손이며 조진극 문중 총무(오른쪽)와 조병기 횡성 조씨 종친회장. [사진 송의호]

근거없는 비방과 모략에 시달려

퇴계 사후 도산서원을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서고 스승의 시문을 정리했던 월천은 당대 사림(士林)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근거 없는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것이 “월천은 평소 정인홍과 가까이 지냈다”, “도산서원 상덕사에 사후 종향된 것은 북인(北人)의 덕이다”란 말이다. 광해군 시기 실권자인 정인홍은 북인으로 남명 조식의 제자다.

월천은 남명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남명이 태어난 삼가(三嘉) 인근 고을에서 65세에 2년간 합천군수를 지냈다. 공교롭게도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이 월천의 제자가 됐고, 그는 이후 월천의 신도비문을 짓는다. 그러나 월천이 남긴 시는 정인홍과 가까운 사이가 아님을 보여 준다. 정인홍이 근거없이 퇴계를 흠집 내자 월천은 그를 걸나라 개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그런데 어떻게 정인홍이 월천의 상덕사 종향을 도왔겠느냐는 반론이다. 월천이 종향된 것은 1614년 도산서원이 완성된 지 38년 만이었다. 이후 온갖 억측이 나왔지만 두 사람이 친했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월천서당 왼쪽 능선에 자리한 월천의 묘소. [사진 송의호]

월천서당 왼쪽 능선에 자리한 월천의 묘소. [사진 송의호]

동문수학한 서애에 “나라 망쳤다” 공격

월천은 성품이 강직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월천은 동문인 서애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시기 일본과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낸다. “상국(相國, 재상)은 평생 성현의 글을 읽고 얻은 바가 단지 이 ‘강화오국(講和誤國, 적국과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망쳤다)’ 네 글자입니까?” 이후 많은 이가 월천과 서애를 좋지 않은 사이로 봤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서애는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답장을 썼다. 월천이 세상을 뜨자 만사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월천의) 강화 배척론은 훗날 강화론에 참여한 류성룡과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됐다”고 분석한다. 조목은 도산서원에 종향되고도 이렇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만큼 어렵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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