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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몸으로 발레리나 꿈 이뤘다…칸이 주목한 실화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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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트랜스젠더 발레리나의 실화에 영감 받은 16살 라라(빅터 폴스터)의 성장영화 '걸'. 루카스 돈트 감독이 각본을 겸해 2018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남우주연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실제 트랜스젠더 발레리나의 실화에 영감 받은 16살 라라(빅터 폴스터)의 성장영화 '걸'. 루카스 돈트 감독이 각본을 겸해 2018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남우주연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영화의 첫 장면, 어린 동생의 어리광을 받아주며 잠에서 깬 라라(빅터 폴스터)가 발레학교로 가 면접을 볼 때까지 그는 평범한 금발 소녀처럼 보인다. 이어진 병원 장면에서 극은 전환을 맞는다. “호르몬 치료받을 날이 기다려지니?”라는 심리상담사의 조심스런 질문과 함께.
7일 개봉하는 영화 ‘걸’은 소년의 몸으로 태어나 발레리나를 꿈꾸는 열여섯 트랜스젠더 라라(빅터 폴스터)의 성장통을 섬세하게 그린다. 뛰어난 기량과 노력으로 명문 발레학교에 들어간 그는 성전환 수술로 완전한 여자의 몸이 되길 원하지만, 꿈을 위해 속으로만 참아온 고통이 둑 터지듯 그를 덮쳐온다.
벨기에 신인감독 루카스 돈트(30)가 자국 출신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27)의 실화에 영감을 받아 몽세쿠흐와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출한 장편 데뷔작이다.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그해 최고의 신인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 빅터 폴스터의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남우주연상, 국제비평가상, 퀴어종려상 등 4관왕을 휩쓸었다.

7일 국내 개봉 성장 영화 ‘걸’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실화 토대 #칸영화제 퀴어종려상 등 4관왕 #"사려 깊은 캐릭터" 호평 많지만 #자해 장면 논란 속 비판 엇갈려

'발레리나' 꿈 이룬 트랜스젠더 소녀 실화

이번 영화는 돈트 감독이 영화학교에 갓 들어간 2009년 몽세쿠흐에 관한 신문기사를 접한 게 계기가 됐다. 가톨릭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동성애자란 정체성을 부정하며 살아온 돈트 감독은 소년의 몸으로 태어나 발레리나의 꿈을 이룬 트랜스젠더의 이야기에 단박에 매료됐다. 처음엔 다큐멘터리를 찍고자 찾아갔지만 몽세쿠흐가 직접 출연하길 꺼리면서 두 사람은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써나갔다. 영화에 담긴 내용은 실화를 상당 부분 각색한 것이지만 “어떤 순간들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고 몽세쿠흐는 돌이켰다.

2018년 할리우드리포터 기고문에서 그는 “나는 내가 다른 여성들처럼 태어나지 않는 데 분개했다”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나를 괴롭히고 실망시키거나 내가 성공하길 원치 않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 자신과 내 생각이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고백한 바다. 그간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다룬 영화들이 대개 사회적 차별에 맞부딪힌 성정체성 고민에 초점을 맞췄다면, ‘걸’은 철저히 라라의 내면적 갈등에 집중한다. 설명적인 대사 대신 그의 일상을 미묘한 뉘앙스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는 방식을 통해서다.

여성 발레복, 토슈즈에 감춘 상처투성이 몸 

 발레학교 여학생들의 동의로 라라(맨 왼쪽)는 여성 탈의실과 샤워실을 쓰지만 성전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다른 소녀들처럼 빨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발레학교 여학생들의 동의로 라라(맨 왼쪽)는 여성 탈의실과 샤워실을 쓰지만 성전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다른 소녀들처럼 빨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라라는 아빠와 함께 여섯 살배기 유치원생 동생을 돌보는 다정한 딸이자, 누나다. 가족은 늘 라라를 사랑하고 지지한다. 발레학교에선 모두 그가 트랜스젠더란 걸 알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의 미소 띤 얼굴 뒤엔 아픔도 있다. 라라는 매일 몸에 달라붙는 여성용 발레복을 입기 위해 돌출된 성기를 테이프로 붙여 감춰야 한다. 테이프 주위엔 훈련 도중 생긴 상처와 염증이 가득하다.
영화엔 라라가 수년간 거쳐야 하는 성전환 수술의 고된 절차도 녹아있다. “음경을 비우고 해면체를 제거할 거예요.” “여성의 성기를 가능한 모방할 겁니다.” 병원 의사들의 설명은 라라가 아직 완전히 갖지 못한 것을 자꾸만 상기시킨다. 발레학교의 또래 소녀들 속에서 그는 긴장되고 초조해 보인다.

외신 "사려깊은 캐릭터 연구" vs "트라우마 포르노"

발레학교 친구들은 라라(맨 왼쪽)를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별 거 아니"라는 태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발레학교 친구들은 라라(맨 왼쪽)를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별 거 아니"라는 태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자존심 강한 라라는 결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진 라라의 마음이 극단적인 상황에 다다르는 장면은 멀찍이 지켜보는 것만으로 고통스럽다.
외신에선 “가장 통렬하게 잘 그려진 사춘기를 담은 영화”(BBC) “극단적인 영역까지 나아가는 사려 깊은 캐릭터 연구”(더랩) 등 호평이 앞서지만 극중 자해 장면은 큰 논란이 됐다. 이 영화가 2018년 말 이듬해 열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발표된 뒤 미국 평단에선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인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가 모두 시스(타고난 신체의 성별과 성정체성이 일치함) 남성이란 점이 다양성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LA타임스는 주인공의 몸에 초점 맞춘 영화의 촬영법이 “공감보다 착취처럼 느껴진다”고, 트랜스젠더 평론가 올리버 휘트니는 할리우드리포터에 실은 글에서 이 영화 속 자해묘사가 “트라우마 포르노”라며 “트랜스젠더에 관한 가장 위험한 영화”라고 비판했다.

몽세쿠흐 "자해 장면은 자살충동 경험의 은유" 

 첫사랑을 궁금해 하는 ‘딸바보’ 아빠에게 “전 남자가 좋다고 말한 적 없다”는 라라의 도발적인 대답 뒤엔 사랑 고백조차 쉽지 않은 그의 고독이 서려 있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첫사랑을 궁금해 하는 ‘딸바보’ 아빠에게 “전 남자가 좋다고 말한 적 없다”는 라라의 도발적인 대답 뒤엔 사랑 고백조차 쉽지 않은 그의 고독이 서려 있다.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더쿱]

이에 몽세쿠흐가 옹호에 나섰다. 미국 영화매체 인디와이어와 인터뷰에서 “내 이야기는 시스 감독의 환상이 아니다. 라라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라 항변한 그는 자해 장면은 실제 경험은 아니지만 “내가 겪은 자살충동이나 어두운 생각에 대한 은유”라고 덧붙였다. 할리우드리포터 기고문에선 “내 경험에 설탕을 입히거나 가장 어두운 생각을 숨기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서 그런 생각들은 실제 존재하고, 드물지 않다”면서 “영화 ‘걸’은 실제 우리 가족처럼 사랑스럽고 응원해주는 가정의 중요성도 보여준다. (트랜스젠더) 아이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에서 라라에겐 터울이 큰 남동생이 있지만 실제 몽세쿠흐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고 동갑내기 남동생 아르노는 현재 벨기에에서 프로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남매가 나란히 영국 언론 더타임스 인터뷰에 나서기도 했다. 돈트 감독은 그의 이런 화목한 가족 분위기도 영화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했다.

영화 '걸'의 실존 모델인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가 쌍둥이 동생 아르노와 함께 영국 언론 '더 타임스'을 만난 지난 2019년 인터뷰 기사. '트랜스 쌍둥이 아르노와 노라 몽세쿠흐 인터뷰: 일란성 형제로 태어나 이젠 남매'란 제목을 달았다. [사진 더타임스 홈페이지 캡처]

영화 '걸'의 실존 모델인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가 쌍둥이 동생 아르노와 함께 영국 언론 '더 타임스'을 만난 지난 2019년 인터뷰 기사. '트랜스 쌍둥이 아르노와 노라 몽세쿠흐 인터뷰: 일란성 형제로 태어나 이젠 남매'란 제목을 달았다. [사진 더타임스 홈페이지 캡처]

또 미국 영화매체 로저에버트닷컴과 인터뷰에서 그는 “트랜스젠더 캐릭터에 관한 영화지만 여성성, 남성성, 정체성,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영화 제목이 ‘트랜스 걸’이 아니라 ‘걸’”이라면서 “영화감독으로서 존경과 사랑, 세심한 배려로 다루면 어떤 주제든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트랜스젠더도 시스젠더의 이야기를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무용수 출신 빅터 폴스터, 첫 연기로 남우주연상 

세계적 안무가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가 빚어낸 발레 장면도 빼어나다. 주연을 맡은 빅터 폴스터(19)는 실제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 발레학교 남학생. 이 영화가 생애 첫 연기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절제된 감정표현, 이번 영화를 위해 처음 익힌 ‘발레리나’로서의 우아한 춤사위로 관객을 매혹한다. 원래 극 중 발레학교 무용수 역에 지원했지만, 여성‧남성‧트랜스젠더를 포함해 500여명 규모 오디션을 열고도 적임자를 못 찾고 있던 제작진이 그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발탁했다.

'걸' 주연배우 빅터 폴스터(왼쪽부터)와 루카스 돈트 감독이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EPA=연합뉴스]

'걸' 주연배우 빅터 폴스터(왼쪽부터)와 루카스 돈트 감독이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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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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