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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노숙자 소설로 미국 최고 문학상 탄 재일 한국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52)

유미리 작가의 『우에노역 공원 출구』. 내가 자주 가는 우에노 공원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사진 기파랑]

유미리 작가의 『우에노역 공원 출구』. 내가 자주 가는 우에노 공원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사진 기파랑]

일본에 살면서 늘 관심이 가는 작가가 있다. 유미리(柳美里). 1997년 『가족 시네마』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했을 때에 알게 된 작가다. 이름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재일 한국인이다. 그 당시에는 관심만 갈 뿐 선뜻 책을 사서 볼 생각은 못 했다. 나의 일본어 실력으로는 읽을 수 없을 것이기에 포기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그 유미리 작가가 ‘2020년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번역문학부문)’을 수상했다. 2014년에 출판된 『우에노역 공원 출구(JR上野駅公園口)』으로다. 관심이 가는 작가가 내가 자주 가는 우에노 공원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그래서 더 끌렸다. 뉴스로 수상 소식을 보고 곧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후쿠시마 출신이다. 한 가정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주인공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돈벌이에 나선다. 그리고 우에노 공원의 노숙자가 된다.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루던 시대에 우에노역은 전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첫발을 내딛는 곳이었다. 주인공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잘 살아내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곳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되리라고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폐업하는 음식점과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업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노숙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징조이다. 불을 보듯 뻔하다. 노숙자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공원이다.

1990년대에는 파란 천막으로 만든 노숙자의 공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사진 양은심]

1990년대에는 파란 천막으로 만든 노숙자의 공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사진 양은심]

1990년대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종종 찾던 우에노 공원에는 노숙자가 많았다. 파란 천막을 치고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먹고 잔다. 처음에는 이 좋은 공원에 왜 저런 사람들이 많은 걸까 의문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제주도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많아도 길가에서 자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사는 나라인 일본에 왜 집도 절도 없이 공원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종종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노숙자의 이야기를 접해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저 사회의 한 현상으로만 보고 있었다.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없으나 공원에서 파란 천막과 상자로 만든 자그마한 공간이 사라졌다. 공원 벤치는 드러누울 수 없도록 손잡이가 설치되었다. 노숙자가 없는 공원은 쾌적했다. 이래야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러한 쾌적함 뒤에 노숙자를 쫓아내는 적극적인 정책이 실행되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드러누울 수 없게 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정책을 편 것으로만 여겼다. 『우에노역 공원 출구』을 읽기 전까지는.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우에노 공원을 찾았다. 따뜻한 낮이었다. 드문드문 노숙자가 보인다. 노숙자의 짐은 알기 쉽다. 그러나 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노숙자는 10명도 안 되었다. 낮에는 뭔가 일을 찾아 사라졌다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숙자를 지원하는 사람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우에노 공원의 노숙자는 60명 정도였는데 코로나 이후 100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예정대로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었다면 노숙자가 될 일이 없었을 사람까지 길거리로 나앉고 있다. 2020년 가을 이른 아침. 강가를 산책하는데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려는 것인지 무료함을 달래려는 것인지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없었으면 무심코 그 옆을 걸어갈 뻔했다. 그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곳에 있었다. 말쑥한 차림으로 봐 노숙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산책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전에 짐을 꾸리고 강가를 걸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둠이 남아있는 시간에 산책하던 나는 그곳을 피해 걷기 시작했다. 방해하기 싫었다. 겨울이 되자 그 사람 모습은 볼 수 없다. 지금은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지나간다.

연꽃이 시든 시노바즈노 연못. 이 연못가에 있는 벤치에도 노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마 사진은 찍지 못했다. [사진 양은심]

연꽃이 시든 시노바즈노 연못. 이 연못가에 있는 벤치에도 노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마 사진은 찍지 못했다. [사진 양은심]

노숙자들이 왜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사람에 따라 이유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관공서가 가족이나 친척을 찾아 연락하기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소설 뒤 해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노숙자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가족과 친척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우에노역 공원 출구』의 주인공은 천황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 아들에게는 황태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지었다. 천황과 같은 날에 태어난 주인공은 도쿄를 중심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다 노숙자가 된다. 같은 날에 태어났으면서도 한 사람은 천황 다른 한 사람은 노숙자다. 황태자와 같은 날에 태어나고, 일가의 희망이었던 아들은 21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갑작스레 저세상으로 간다.

소설 속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기지 못하는 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일출판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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