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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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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고 말했다. 개인과 조직, 정부가 정당하고 용감해지려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정당한 행동이 정당성을 높이고 용감한 행동이 용감성을 고취한다.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입으로만 하는 주장은 힘이 없다. 행동은 말보다 백 배나 목소리가 크다.

민주주의 가치 저버린 전단금지법 #전 세계가 반인권법이라며 비판 #원칙 근거한 정책 펴야 당당해져

대한민국에서 정당함은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지켰느냐 여부로 판단된다. 개인의 자유권과 평등권, 인권, 행복추구권 등을 보장하는 정부 정책은 헌법 정신을 구현하는 만큼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안보나 사회 질서 유지 등을 이유로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권리를 제약할 경우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과도하게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면 헌법 정신을 훼손해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정부 정책 중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로 인해 국민은 분열하고 정부 신뢰는 추락했다. 대표적인 게 대북전단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이다. 정부와 여당은 대북 전단을 날릴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는 법을 강행 처리했다. 그레고리 믹스 신임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을 비롯한 미국 정부·의회 관계자들과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 전달을 어렵게 하는 반인권법이라며 반대한다. 미국 하원이 다음 달 이 법을 문제 삼는 청문회를 개최한다면 한국 정부는 반인권 국가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1월 20일) 초기에 청문회가 열린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한국 정부는 출발부터 삐걱거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불거진 데는 정부·여당이 남북 관계 개선에 목을 맨 채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나 세계 최악인 북한 인권 실태에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정부가 행동으로 이를 거부한 셈이다. 그 결과 인권 선진국으로 향하던 한국은 다시 인권 후진국으로 뒷걸음칠 처지가 됐다.

서소문 포럼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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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은 북한 문제만 나오면 민주주의 가치나 현실을 외면한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일 신년사에서 북한의 제8차 당 대회와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이 이달에 열리는 게 우주의 기운이 한반도에 집중되는 ‘컨버전스’(한곳에 모이는 수렴)로 볼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남북 관계 현실을 직시해 통일 정책을 짜야 하는 장관이 아니라 우주의 기운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점쟁이의 말처럼 들린다.

이 정부의 검찰 개혁도 방향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당초 검찰 개혁은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해 국민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권력 핵심부를 겨냥한 검찰의 칼날을 무력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 정부 출범 초기 윤석열 검찰총장이 과거 정권을 적폐로 몰아 수사할 때는 손뼉 치다가 그 칼이 정권을 향하자 그를 물러나게 하려고 갖은 꼼수를 동원했다. 사법부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무법적 조치에 제동을 건 것은 큰 다행이었다.

검찰이 맡았던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이나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감사 방해 사건 등은 신설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서 맡게 된다. 공수처가 권력형 비리 의혹 사건들을 얼마나 엄정하게 처리하느냐는 신설 조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건 과거의 말과 현재의 행동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는 자기 편의 반칙과 편법에는 관대하고 상대의 허물만 공격하는 문 정권 지지자들의 이중잣대를 보여줬다. 정부·여당이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개혁을 소리친다면 여론은 더 나빠질 것이다.

개혁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개혁 과정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남북 관계 개선이나 검찰 개혁, 친환경 에너지 전환 등을 추진할 때 그 과정이 정당해야 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 목적에 눈이 멀어 과정의 정당성을 무시한다면 그 정책은 사상누각이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은 전체주의 논리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과거를 잊고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삶이 아주 짧고 초조한 법이다”고 말했다. 개혁을 내건 정부·여당의 성급한 정책들에 이런 초조함이 묻어난다. 개혁은 순리대로 해야 잡음이 적고 효과가 크다. 안 그러면 저항을 불러 좌초하기 쉽다. 새해엔 민주주의 원칙이 지켜지는 당당한 나라를 보고 싶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