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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낸시" 트럼프 저주 이겼다, 네번째 살아난 80세 펠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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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현지시간) 개원한 제117대 의회에서 하원의장에 선출되자 의사봉을 높이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현지시간) 개원한 제117대 의회에서 하원의장에 선출되자 의사봉을 높이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는 가고, 펠로시는 남았다'

[후후월드]

80세의 낸시 펠로시가 미국 하원의장에 재선출되자 워싱턴 정가에서 나온 얘기다. 그를 '미친 낸시'로 부르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배해 이달 20일 백악관을 비우게 됐다. 하지만 트럼프에 '싸움닭'처럼 맞섰던 펠로시는 권력 서열 3위의 자리를 지키며 2년 더 의사당에 남게 된 것이다. 벌써 네 번째 하원의장 임기다.

낸시 펠로시 의장은 3일(현지시간) 개원한 제117대 의회에서 공화당의 케빈 메카시 원내대표를 216표대 209표로 제쳤다. 그는 "새 의회는 매우 어려운 시기에 출범하게 된다"며 "저를 믿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바이든과 함께 미래를 향해 일하는 것을 기다리기 어려울 만큼 고대한다"고 했다.

연임 확정 뒤 의사봉을 높이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로 다시 한번 온라인상에 회자되는 이미지인 '밈(meme)'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마블 영화 '토르'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다. 펠로시는 지난해 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 직후 바로 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문을 '박박' 찢는 장면으로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지난해 2월 미 의회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이 끝나자 연설문을 찢고 있다. [EPA=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지난해 2월 미 의회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이 끝나자 연설문을 찢고 있다. [EPA=연합뉴스]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늘 화제의 중심에 서게 한 원동력은 뭘까.

"뼛속까지 정치인 DNA"

이탈리아계 미국인 펠로시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1940년 출생했다. 가톨릭계 정치인 가문에서 일곱 자녀 중 막내로 자랐다. 아버지는 5선 하원의원이자 볼티모어 시장만 12년을 지낸 엘리트 정치인이었다. 오빠 역시 볼티모어 시장을 역임했다.

펠로시가 처음부터 정계에 발을 디딘 건 아니다. 워싱턴 D.C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던 당시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던 남편 폴 펠로시를 만나 일찌감치 결혼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뉴욕 맨해튼으로 이사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거주지를 옮겼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남편은 현재 부동산 재벌로 알려진 사업가다. 그는 5명의 자녀(딸 4, 아들1)를 낳은 전업주부로 살았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사업가 남편을 만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아왔다. 공화당 인사들은 그를 '샌프란시스코 리버럴'이라 비꼰다. [AFP=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사업가 남편을 만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아왔다. 공화당 인사들은 그를 '샌프란시스코 리버럴'이라 비꼰다. [AFP=연합뉴스]

신문을 꾸준히 읽고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던 '억척 주부' 펠로시가 정계에 입문한 건 막내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인 1987년이었다. 46세의 정치 초년병으로 보궐선거에 뛰어들었다. 출발은 늦었지만 이후 정치행로는 탄탄대로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리 11선을 하고 2002년 미 의회 사상 첫 여성 하원 원내대표가 됐다. 그리고 조지 W. 행정부 시절이던 2007년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됐다. 2020년 현재 18선 하원의원이자 네번째 임기를 맞는 하원의장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오랜 정계 생활에도 여전히 가정적인 면모도 보인다.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이던 2006년, 중간선거 대승 결과에 아침 일찍 전화를 건 부시 대통령에게 "아이가 나왔니?"라고 대뜸 물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출산이 임박한 막내딸 알렉산드리아의 전화를 초조히 기다리던 참이었다고 한다.

"아르마니 입는 진보" 공격도 

선명한 주장과 활동적인 성향으로 정치자금 모금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정치인으로 당내에서 인정받는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펠로시는 2002년부터 2018년까지 민주당을 위해 약 5억 달러(약 5442억원)를 모금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조 바이든 민주당 찬조 연설 중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뒤에서 바이든 당시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박수를 치며 웃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조 바이든 민주당 찬조 연설 중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뒤에서 바이든 당시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박수를 치며 웃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펠로시는 큰 정부를 지향하고 낙태를 옹호하며 총기소유를 반대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중국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대중 강경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부시 행정부 당시 앞장서 파병을 반대했고, 금융위기가 온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8400억 달러의 부양책을 통과시켰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오바마 케어' 통과를 위해 공화당과 민주당을 오가며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화려한 패션으로도 시선을 끈다. 공화당 인사들은 그가 명품 브랜드인 아르마니를 즐겨 입는다며 '샌프란시스코 자유주의자'라고 비꼬기도 한다. 한국식으론 '강남좌파' 의 뉘앙스다.

정계 은퇴 준비하다 트럼프 등장에 계획 접어

그는 당초 2016년 정계 은퇴를 고려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이기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은퇴계획을 접었다. 2018년 민주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면서 그는 다시 하원의장에 선출됐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천적'으로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2019년에는 미국 역사상 세 번째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이런 추진력이 펠로시에 거부감을 느끼던 민주당 의원들조차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고 BBC는 전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020년 신년 국정연설 직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박수를 치고 있다.[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020년 신년 국정연설 직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박수를 치고 있다.[AFP=연합뉴스]

역설적으로 그를 '장수 하원의장'으로 만든 건 '정적' 트럼프였던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펠로시에 악재가 터질 때마다 "미친 낸시가 몰락한다"며 저주가 깃든 표현을 동원했지만 정작 먼저 자리에서 내려 온 건 그 자신이었다.

펠로시는 2022년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남긴 '잔재'를 정리하는 이번 회기가 마지막 정치 여정이 될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트럼프만큼이나 '트럼피즘'과 대적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민주당이 기대했던 '블루 웨이브'(민주당 바람)가 말 그대로 기대에 그치며 연방의회 선거에선 10석을 뺏겼다. 상원은 조지아주의 결선 투표에 따라 다수당이 결정될 예정이지만 공화당이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78세의 바이든 대통령보다도 고령인 나이도 핸디캡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다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된 미국 사회를 치유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그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까. 백전노장은 일단 의사봉을 높이 들어 올렸다.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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