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높으신 분들도 몇채씩 갖고 있는데~’…아파트 세태가 가곡으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아파트’ 뮤직비디오. 피아니스트 김가람(왼쪽), 바리톤 김재일이 나왔다. [사진 오푸스]

‘아파트’ 뮤직비디오. 피아니스트 김가람(왼쪽), 바리톤 김재일이 나왔다. [사진 오푸스]

“나랏일 하시는/높으신 분들도/몇채씩 갖고 있는데/그분들이 서민대책을 만들어요/으하하하 우습다.”

연가곡집 ‘아파트’ 낸 류재준 #층간소음·경비원 등 22곡 담아 #“청중들, 겨울나그네 부를 땐 쿨쿨 #듣는 이와 연관된 노래 쓰고 싶어”

경쾌하고 빠른 2분의 2박자. 중후한 음색의 바리톤이 스타카토로 끊어 부르는 노래는 직설적이다. “서울시내 아파트/평균가격 십사억/…/이공이공 최저시급/팔천오백 구십원/십원도 안쓰고/삽십년을 모으면/그제야 육억사천.”

노래 제목은 ‘아파트 구입’. 작곡가 류재준(51)이 이달 완성한 연가곡집 ‘아파트’ 중 10번째 곡이다. 노래 15곡과 피아노 전주 7곡으로 된 이 가곡집은 한국의 아파트와 관련한, 노골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저 너머 힐스테이트/이편한 세상/하늘은 푸르지오/끼리끼리 살아야지/교양있는 사람들”(1곡 ‘아파트먼트’) “정말진짜 부자들은 이런데서 살지않지”(5곡 ‘지루해’)

바리톤과 피아노가 함께 하는 노래들은 아파트 가격뿐 아니라, 여기에서 살아가는 여러 사람을 다룬다. 경비원, 택배기사, 수험생, 명예퇴직한 주민 등이다. “아무리 더워도/에어컨은 사치죠/눈치없이 원하면/한방에 짤려요”(2곡 ‘경비원’)

작곡가는 이런 곡을 왜 썼을까. “독일·이탈리아에서 어렵게 성악 공부하고 온 후배들이 귀국 독창회에서 독일어로 ‘겨울나그네’ ‘시인의 사랑’을 부르는데, 청중은 자고 있더라.”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류재준은 “듣는 사람들과 연관된 노래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아파트는 한국의 청중 모두 자신의 얘기로 여기는 주제라고 봤다.

류재준

류재준

류재준은 서울대 음대 작곡과, 폴란드 크라코프 음악원을 졸업했고 고(故)강석희, 고(故) 크쉬스토프 펜데레츠키를 사사했다. 서양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면서 한국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2013년 홍난파 음악상 수상을 친일행적을 이유로 거부했고, 2015년엔 세월호 희생자 추모곡을 썼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금은 서울국제음악제와 앙상블 오푸스의 예술감독이다.

이번엔 아파트다. “아파트를 얻으려 많은 걸 희생하고, 허상을 좇으며 살다가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닌 걸 알게 되지 않나. 한국에서 아파트는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 일어나는 갈등, 욕망을 대변한다.” 가사는  다락방 미술관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등을 낸 문하연 작가에게 의뢰했다. “작가와 함께 가사를 여러번 고치며 내 생각을 많이 넣었다. 특히 정책 만드는 사람들이 집을 몇채씩 갖고, 가장 아파트를 사랑하면서 정책을 따르라고 한다는, 이런 ‘문제적’ 내용은 다 내가 쓴 가사다.”

음악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바리톤 김재일과 피아니스트 김가람이 출연한 ‘아파트 구입’ 뮤직비디오는 발랄하다. “유머는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만 보면 한도 끝도 없다.” 류재준은 “셰익스피어 ‘리어왕’에서 왕에게 제대로 얘기하는 이는 어릿광대뿐. 나도 그렇게 할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파트’를 구상한 건 5년 전. 강남 아파트를 30년 전 2000만원에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음악을 머릿속에서 완성하는 데 5년, 악보로 옮기는 데 4개월이 걸렸다. 곡 ‘아파트 구입’엔 음을 단 4개만 썼다. “십원도 안 써야 되니까 음도 아껴봤다”고 했다. 몇몇 노래는 돌림노래다. “남들 사니까 따라 사는 심리를 표현했다.” 세번째 곡 ‘층간소음’은 성악가가 윗층과 아랫층 사람을 다 부르는 1인 2역이다. 류재준은 “각 인물에게 고유의 멜로디를 줘서 각 층 사람들을 다르게 표현했다. 더 좋은 아파트로 가야만 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 바깥을 꿈꾸는 ‘인어공주’를 연상케 하는 음악도 넣어봤다”고 했다.

현대 사회 문제를 직접 담은 최초의 한국 가곡집이랄 수 있는 ‘아파트’에 대해 류재준은 “드라마와 음악이 함께 있는 ‘가극’이라는 새 장르로 규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7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이후 2년 정도 공연 계획이 잡혀있다. 한번 만들어놓고 연주자들이 계속해서 부를 수 있는 레퍼토리로 만들려 한다.”

사회 문제를 담은 음악을 계속 만들겠다는 뜻도 밝혔다. “학벌 문제를 다룰 계획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의’를 비꼬는 음악도 생각 중이다. 이런 내용을 담으려면 음악이 완성돼 있어야 하고,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냥 넋두리가 아니라 예술로 내놔야 한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