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현곤 칼럼

결국 40대도 돌아섰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0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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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젊을 때 좌파 한번 안 해보면 바보요, 늙어서도 좌파면 더 바보다.’ 19~20세기 서구사회에서 회자된 말이다. 젊을 때 좌파였다가 나이 들어 우파로 옮기는 건 전 세계의 공통된 흐름이었다. 우리나라도 20~30대에 진보, 불혹(不惑)이라는 40대를 변곡점으로 50대 이상은 보수가 우세했다. 2012년 대선에서 이 구도가 깨졌다. 문재인 후보가 패배했지만 40대에서 55%를 득표했다. 박근혜(44%) 후보를 크게 앞섰다. 40대가 진보의 핵심 지지층으로 떠오른 것이다. 2019년 조국 사태 때는 3040(조국 지지)과 세대를 뛰어넘어 2050(조국 반대)이 맞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젊을 때 좌파, 나이 들어 우파’의 공식이 깨진 셈이다.

1970년대생 나이 들어서도 진보
잇단 악재에도 50~60% 문 지지
백신 사태로 지난해 말 첫 40%대
죽느냐 사느냐 문제에 폭발한 것

40대는 어떻게 진보로 남았을까. 첫째, 고령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미당(未堂) 서정주는 45세이던 1959년, ‘마흔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라는 시를 썼다. 40대는 귀신이 보일 정도로 연륜이 쌓였다는 의미다. 요새는 사뭇 다르다. 평균연령이 2008년 37세에서 2015년 40.2세, 2020년 42.8세로 급격히 높아졌다. 저출산·고령화를 고려하면 평균연령은 계속 올라간다. 이러니 ‘나는 아직 청년이고, 정의감에 불타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청춘 40대’가 많다.

둘째, 40대의 인생 역정에서 진보로 남은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70년대생이다. 형·언니들의 민주화 열기를 어렴풋이나마 느끼면서 80년대 초·중·고를 다녔다. 사회에 첫발을 뗀 20대에 외환위기를 맞아 취직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환위기를 고비로 한국 경제는 저성장에 들어갔다. 40대는 고도성장의 과실을 얻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이 큰 세대다. 기성세대가 잘못해 외환위기가 왔다고 여겼다. 반감과 피해의식이 컸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에게 심하게 했고, 미국이 뒤에서 IMF를 조종했다고 생각했다. 이때 자라난 반미 감정이 2002년 효순·미선양 사건을 계기로 일순간에 촛불집회로 타올랐다. 차제에 확 바꿔버리자는 열기는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 상당수는 노사모의 주축이 됐다. 30대가 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로 이명박 정부를 초반에 무릎 꿇렸다. 40대인 2016년 말에는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주도했다.

셋째, 40대는 상대적으로 친노동정책의 덕을 보는 연령대다. 진보가 많은 현실적 이유다. 정규직은 40대가 363만 명으로 가장 많다. 문재인 정부에서 힘이 세진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수혜자다. 40대 사무직이 대통령의 주된 지지층인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 40대도 불황을 피해갈 수 없었다. 2019년 취업자가 전 연령대에서 가장 많은 13만 명 줄었다. 지난해 14만 명 더 감소했다(통계청). 문 대통령은 “40대의 고용 부진이 매우 아프다”며 콕 짚어 걱정하곤 했으나 소용없었다. 40대의 실직은 치명적이다. 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며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다.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 인생 절벽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면 정부를 원망할 만도 한데, 40대의 대통령 지지율은 50~60%대에서 꿈쩍도 안 했다(리얼미터).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73.5%까지 치솟았다. 거의 몰표다. 친문 맘카페를 중심으로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는 30대(66.2%)보다 높았다. 조국 사태를 넘어 윤미향·박원순 추문, 부동산 참사, 윤석열 찍어내기, 입법 독주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부의 내로남불과 편가르기, 남탓에도 눈을 질끈 감았다. 놀라운 결속력이다. 전월세난에 질려 지난해 여름을 고비로 마음이 떠난 30대와도 결이 좀 다르다. 40대가 50~60대까지 진보로 남는다면 이해찬의 ‘20년 집권’이 헛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해 막판에 이상 조짐이 나타났다. 40대 지지율이 12월 둘째 주 40%대(46.3%)로 처음 주저앉았다. ‘잘못한다’(50.8%)가 더 많은 것도 처음이었다. 꾹 참던 40대가 등을 돌린 건 백신 때문이었다. 당시는 영국을 필두로 40여 개국이 백신 접종을 시작한 시기다. ‘우리는 백신을 못 구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백신은 보수·진보, 내편·네편의 이슈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차원이 다른 문제다. 폭발성이 훨씬 강하다. 정부는 그걸 간과했다. 연말에는 40대 지지율이 45.4%로 더 떨어졌다.

백신 사태로 온 나라가 세월호가 됐다. 정부의 부끄러운 민낯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국민 건강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 “백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외려 큰소리치는 오만. 지도자들의 민망하고 무책임한 행보. K방역 자화자찬에 매달리던 정부는 ‘큰일 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랴부랴 백신 도입 소식을 쏟아내고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떤 백신을 맞는 건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주요국보다 반년쯤 늦은 건 분명해 보인다. 일본에서 먼저 백신을 맞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백신 여권’을 손에 쥔 다른 나라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진보 지식인들은 진보의 분열을 걱정한다. 백신 사태로 마지막 보루인 40대마저 돌아서면 ‘진보의 분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정권 말기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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