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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대북전단금지법이란 자살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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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흑인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수석 졸업생답게 지적이며 애국가를 우리말로 부르는, 알아주는 지한파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 29일 최종현학술원 세미나에서 눈길을 끄는 의견을 냈다. 그는 “제재와 함께 대북 관여 정책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보텀업(Bottom-up·상향식) 아닌 톱다운(Top-down·하향식) 방식의 접근법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주변 사람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북한 눈치 보다 인권탄압 비판 자초 #정상회의 전 한·미 관계 나빠질 듯 #소탐대실의 악수, 당장 철회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겪은 다수의 한반도 전문가에겐 톱다운 방식은 몹시 부정적으로 들린다. 이들에겐 김정은-트럼프 간 담판으로 북한 비핵화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 쇼비니스트(chauvinist·맹목적 애국주의자)에다 즉흥적인 트럼프가 어디로 튈지 두려웠던 탓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차기 바이든 행정부는 실무진 위주의 보텀업 방식을 쓸 공산이 크다. 이런 판에 남북문제에 해박한 브룩스 전 사령관이 하향식 접근법, 즉 김정은과 미국의 정상급 인사 간 담판을 제안하니 신선하게 들릴 수밖에.

트럼프 탓에 이미지가 구겨져서 그렇지 하향식 의사결정엔 죄가 없다. 총을 악당이 쓰면 흉기지만 경찰 손에 가면 평화의 도구다. 김정은의 상대로 합리적 다자주의자인 존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 혹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내정자가 나선다 치자. 그들이 온 겨레가 기뻐할 해결책을 끌어내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해법이 적용되려면 중요한 전제가 만족돼야 한다. 신뢰에 바탕을 둔 한·미 간의 원활한 공조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 정권은 북한 눈치만 보다 대북전단금지법이란 어처구니없는 자살골을 내질렀다. 오만 반대에도 이 법을 밀어붙인 속내는 분명해 보인다. 북한의 감정을 누그러뜨려 남북대화 무드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현 정권의 치적으로 삼겠다는 걸 거다.

하지만 이런 꿈은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례적으로 거친 국제사회의 반발이다. 모든 인간에겐 진실을 알, 그리고 진실을 전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대북전단을 뿌렸다고 최고 3년간 투옥하겠다니 국제적 여론이 들끓는 게 당연하다. 옛 민주화 세력을 주축으로 한 문재인 정부가 국제사회에선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인권문제뿐이 아니다. 미국은 북한을 변화시킬 최선책이 외부 정보 유입이라고 보고 이 전략을 나날이 강화해 왔다. 이 덕에 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미국민주주의진흥재단(NED)의 대북 민간 프로그램 지원금은 2016년 206만 달러에서 지난해 482만 달러로 2.5배나 늘었다. 이런 판에 대북전단 살포를 처벌하겠다 하니 미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미국 내 반대의 진앙이 의회의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라는 사실이다. 50여 명의 여야 의원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미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해외의 인권 보호가 미 대외정책의 핵심 목표 중 하나인 까닭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 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크리스 스미스 하원의원은 대북전단금지법을 따지는 청문회를 다음 달 내로 열겠다고 벼른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적 가치에 대한 한국의 기여도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도록 국무부에 요청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청문회는 공교롭게도 바이든 행정부가 구상 중인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 몇 주 전으로 예정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정상회의를 한·미 간 대북정책을 조율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회의를 코앞에 두고 한국이 북한 인권을 외면하는 비민주 국가로 낙인찍혀서야 무슨 성과를 내겠는가.

이제라도 당국은 남북대화에 집착한 나머지 대북전단금지법을 밀어붙여 대북관계 전체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중단해야 한다. 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옥죄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전형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