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송호근 칼럼

방역정권의 정신구조를 묻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0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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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뒤죽박죽이었다. 정권의 전방위적 싸움이 코로나와 가세해 일상을 들쑤셨다. 2020년이 그렇게 가고 신생의 해가 솟았다. 시간에 마디를 두는 것은 혼란을 묻고 가슴 벅찬 개활지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힘든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갇혔다. 이중의 벽이다. 코로나가 명령한 동선 금압의 벽과 집권세력이 강박한 절대이념의 벽. 두 벽의 공통점은 바이러스 박멸, 곧 방역(防疫)이다. 3년 반이 경과한 요즘 현 정권은 ‘방역정권’이란 생각이 맴돈다. 적을 호명해 척결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쌓는 정권. 모든 적수를 바이러스, 박멸 대상으로 간주했다. 언술과 행동, 민생정책의 본질이 그랬다. 국민들은 정권의 확증편향 울타리에 갇혔다. 코로나 장벽은 백신접종으로 낮아질 터, 집권층의 편집증 망탈리테(정신구조)를 치유할 통치학적 백신은 나올 것인가?

적수를 호명해 박멸하는 방역정권
비판적 생체지식, 민주·분배 절대화
군부와 민주정권 다 관념론 신봉자
대륙사상의 하수인이 되고 싶은가

인고의 터널은 연장될듯하다. 적어도 한번쯤 진솔한 사과나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생각을 달리 했을지 모른다. 정책엔 항상 부작용, ‘의도치 않은 결과’가 발생한다. 현 정권은 그 보편적 법칙을 줄곧 부정했다. 변명도 자책인정이 아니라 만회의 술수였다. 백신 확보를 위한 대통령의 느닷없는 퍼포먼스가 그랬다. 전화 한통으로 ‘물량 확보 끝!’이라면 왜 그 전에는 손 놓고 있었을까. 3년 반 동안, 청와대발(發) 사과를 딱 한번 들었다. ‘추·윤 대립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렸다’까지는 흐뭇했는데, 검찰개혁 운운에서 그만 악몽이 되살아났다. 대저, 거대여당과 실세가 목메어 합창하는 검찰개혁은 무엇을 위함인가? 전국민이 겪은 일년 스트레스 총량을 보상하고도 남는가?

사법부를 백번 불신해도 직권정지 무효라면 한 달쯤은 자성기간을 가져야 양심정치다. 거대여당의 집단 포화는 새벽이 밝자 개시됐다. ‘촛불혁명을 훼손한 사법부의 쿠테타’ ‘검찰과 법원의 선명한 선민의식’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반법치적 울분에도 모자라 총장 탄핵 카드를 꺼내들었다. 179대 1, 어딘가 치졸하지 않은가? 필자는 거꾸로 읽게끔 됐다. ‘촛불혁명을 왜곡한 독선행보’ ‘정권실세의 유별난 선민의식’ ‘삼권분립 존중이 민주주의’라고. ‘대통령이 외로워’ 안쓰러운가? 코로나에 시달리고 생계가 막막한 국민들이 더 외롭다.

적수와 경쟁자에 대한 뒤틀린 경계의식과 확증편향은 군사정권이 이들에게 아로새긴 ‘저항적 생체지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 청년시절, 군부가 가한 물리적 폭력이 이항대립적 민주신념의 절대화를 낳았다. 우리들의 민주!는 순도 백 프로다. 타협도 양보도 없다. 적수의 비난과 경쟁자의 도전은 구악(舊惡)과 적폐 잔치일 뿐. 소득주도성장, 주택정책, 기업규제 모두는 하층과 약자를 위한 십자군 출정이라는 확신. 부작용은 시간이 해결한다는 비이성적 신념. 그리고 사회 경제계의 엘리트 카르텔은 공공의 적.

소주성을 주도한 일단의 부역꾼들은 면책 마을로 은퇴했고, 하층과 무주택자를 난도질한 김현미 국토부장관은 집값이 오른 아파트로 어리둥절 귀환했다. 두 배로 오른 종부세는 어쨌든 즐겁게 납부할 것이다. 토지소유 금지를 주장한 헨리 조지, 토마스 페인의 철지난 급진사상가를 액자에 걸고 말이다. 팬데믹으로 일자리는 고갈되는데, 기업규제 3법은 벌써 통과됐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계류 중이다. 해고노동자가 노조로 귀환해 자해라도 한다면 고용주는 처벌대상이다. 문명과 자본의 구조법칙이 완전히 뒤바뀐 AI시대에 의기양양 휘두르는 방역정권의 1980년대식 생체지식은 한국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

‘타협과 양보’는 권력재창출의 지혜이거늘 생체지식 리스트에는 없다. 중간지대는커녕 멀고 먼 ‘이상적 민주’의 극단에서 꼼짝달싹 않는다. 군부독재가 그랬듯, 절대적 관념론 신봉자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최고의, 최후의 관념론 군주국이었던 조선의 후예다. 양극의 진자운동을 관할하는 것은 절대적 관념론. 노론(老論) 수장 송시열의 존주론(尊周論)은 유럽 관념론의 원조인 헤겔(Hegel)을 능가한다. ‘국가는 역사의 구현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법철학』에서 그래도 헤겔은 충돌하는 시민주권의 조정기구(의회)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조선의 노론(老論)은 만인을 강상명교(綱常名敎)의 울타리에 가뒀다. 국민을 ‘그들의 민주관념’에 가둔 현 정권의 망탈리테다.

노론의 원혼(冤魂)이 21세기 한국에 옮겨 붙었는가?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그것은 무사고(無思考)의 원천이다. 박근혜가 애국심 하나로 모든 일탈을 치장했듯이, 현 정권은 유토피아적 민주! 하나로 독선의 길을 간다. 현실은 증발, ‘사고(思考)없음!’이다. 사고(事故)를 치고 있다는 것은 알까. 이 정권이 일찌감치 해양을 등지고 절대론의 발상지 대륙으로 돌아선 것도 이제 조금은 이해된다. 그곳엔 중국과 북한이 있다. 대한민국을 대륙사상의 하수인, 대륙정치의 출납계로 만들고 싶은 게다.(17년간의 집필을 잠시 멈추려 합니다. 독자들께 심심한 양해를 구합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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