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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도둑맞은 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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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완서 소설 중에 『도둑맞은 가난』이란 단편이 있다. 부잣집 아들이 대학생 신분을 감춘 채 여성 노동자와 동거하며 가난 체험을 한다는 내용이다. “아버진 만족하고 계셔, 내가 그동안 그 지독한 생활을 잘 견딘 걸.” 주인공은 그가 가난마저 훔쳐갔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검찰개혁부터 “이·박 사면”까지 #원칙도, 철학도, 선후도 없었다 #‘진보’는 멋진 수식어일 뿐인가

지금, 그 대목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검찰개혁이 스치고 간 자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신(神)은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과정이 변질되면 결과도 변질된다. 더구나 검찰개혁만큼 과정이 중요한 일이 있을까. 표적, 봐주기, 별건, 먼지떨이…. 수사 과정을 바로잡자는 것이 검찰개혁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 역시 개혁적이어야 한다. 수사든, 징계든 절차적 정당성은 지켜져야 한다.

추미애 법무부는 철저히 거꾸로 갔다. 어떻게든 윤석열의 존재만 치우면 검찰개혁은 완성된다는 식이었다. 인사권, 수사지휘권, 감찰권, 징계권.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권한을 남발했다. 거친 말들과 강퍅한 태도는 개혁의 주력이 돼야 할 중립지대 검사들까지 등 돌리게 했다. 그 결과 막강 파워의 검찰총장이 우스꽝스럽게도, ‘탄압받는 약자’라는 마스크를 걸치고 있다.

“사법 쿠데타다.” “입법을 통해 국민에게 충성하도록 만들겠다.” 법원의 ‘총장 직무 복귀’ 결정 직후 여당이 보인 말본새다. 사법농단엔 “재판의 독립 침해”라며 목청을 높이던 이들이 왜 법원을 향해 ‘충성’을 들먹이는가. 판사는 대중의 박수 소리가 들릴 때 오판한 게 없는지 불안해해야 하는 직업 아닌가. “입법을 통해… 만들겠다”는 호언엔 174개의 의석만 있으면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오만과 치기가 번뜩인다.

희한한 끝말잇기는 해가 바뀌어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법의 과잉지배”를 우려하던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신년 메시지를 내놨다. “적절한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을 건의하겠다.” 재판 절차도 마무리되지 않았고, 당사자들의 한마디 반성도 없는 ‘부적절한 시기’에 사면이라니…. 이러려고 그 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었던 것인가.

늘 중요한 건 무엇을 하지 않느냐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본청 앞 단식농성은 어느새 스무 날을 넘겼다. 노동현장의 소중한 생명들이 하루에 7명꼴로 정찰제처럼 으깨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농성장에 찾아와 “야당을 최대한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아들 잃은 어머니(김미숙씨)가 물었다. “여태까지 여당이 많은 법을 다 통과시켰잖아요. 그런데 이 법은 왜 꼭 야당이 있어야 돼요?”

신중함도 선택적인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 유출 과정에 남인순 의원이 있었다는 수사 결과에 남 의원도, 민주당도 침묵하고 있다. “조금 더 팩트 확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부끄럽지 않은가. 이러고도 여성 인권을, 젠더 폭력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왜 원칙도, 철학도, 선후도 없는 걸까. 의문이 풀린 건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다. 문 대통령은 변 장관의 구의역 사망 노동자 관련 발언(“걔만 조금 신경 썼으면…”)에 대해 “충분히 비판받을 만했다”며 당부했다. “그 교훈을 제대로 실천하는 길은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는 것이다.”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과정은 크게 개의치 않겠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진보에 투표하며 품었던 기대를 도난당한 느낌이에요.”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란 걸 이 정부 들어와 알게 됐습니다.” 낭패감은 염증으로 변한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고, 정부·여당은 자세를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가 권력의 민낯을 멋지게 치장하는 수식어일 뿐이라면 ‘도둑맞은 진보’, 이 여섯 글자가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