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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업 정서 틀 안에 갇힌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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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선욱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선욱 산업1팀 기자

최선욱 산업1팀 기자

발전소에서 일하던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낸 어머니는 국회 앞 농성장에서 새해를 맞았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고(故)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다.

산업재해 근절 시민운동을 하는 김용균재단의 이사장인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경영자가 안전조치를 사전 이행했는지 등을 조사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서다. 이를 통해 사업주들이 안전장치를 철저히 마련하게 되고, 그만큼 산업재해가 줄어들 거라는 게 법안 취지다.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 한다’(No More Death)는 이 법안에 딸린 구호다. 이 말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기업들이 법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고 책임을 규명하는 요건이 불명확하다는 데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정부 기조나 여론에 따라 사업주 책임에 대한 일관성 없는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나 중소기업중앙회가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한 법안”이라고 공개 반발하는 게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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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법원도 경영계 주장에 일부 동의했다. 법무부가 최근 이 법안 중 책임소재 규명 부분이 헌법상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는 수정 필요 의견을 낸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에 지휘권이 있는 법원행정처도 “부주의나 책임의 경중이 아닌 사상자 수에 따른 처벌 형량을 법으로 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취지의 지적을 국회에 전달했다. 하지만 경영계 입장에선 달걀로 바위를 친 수준이다. 그 바위는 정치권력이 아닌 반기업 정서다. 다수 의석의 여당은 현재의 반기업 정서를 의식해 법안을 추진하고, 야당도 굳이 이를 막아 점수를 잃을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다.

또 하루 7명꼴로 산업재해 사망자가 생기는 상황에서 경영계의 호소는 ‘사람이 죽어도 나는 감옥 가기 싫다’는 저항 정도로 비친다. 국민의힘이 법안 통과를 전제로 세부 조항을 조율하는 것도 이 같은 정서를 의식한다는 평이 짙다. 정치권의 법안 찬성 주장 중 ‘가벼운 처벌에 그침’ ‘책임을 묻기 어려움’ ‘형법 적용이 까다로움’ 등의 문구에서 그 의도가 드러난다.

다만 이 법안에 찬성하는 합리적 시민은 기업인 구속이라는 통쾌함을 노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민도 생명을 천시하는 게 아니다. 이 점을 국회가 잊지 않으면 8일 임시국회 종료 전이라도 합리적 결론이 나올 것이다.

최선욱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