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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독 공산독재 못 떨쳐내, 새 껍데기 쓴 사회주의 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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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호 27면

독일 통일 그 후 30년 〈3〉

슈타지 심문 감옥 베를린-호엔쉔하우젠의 감시탑 전경.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슈타지 심문 감옥 베를린-호엔쉔하우젠의 감시탑 전경.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있던 슈타지(국가보안부)의 해체와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일당 독재 종식, 이 두 가지가 1989년 동독 시위대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다. 슈타지는 89년 말에서 90년 초로 넘어가는 시점에 해체됐으며 SED 통치는 90년 3월에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동독의 자유민주선거를 통해 종식됐다.

독재 잔재 조사위·청산재단 세워 #불행한 과거 흔적 지속적 제거 #완전히 청산 못 해 미완의 과제 #사회주의통일당 후신 정당 활개 #좌파당, 서독 지역서도 연정 참여 #슈타지 희생자 조롱, 테러 미화도

하지만 이 두 기관이 남긴 잔재로 인한 갈등은 동독의 소멸과 관계없이 존속했으며 실제로 독일은 아직도 이 문제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불법이 횡행했던 동독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시민운동가들에게 정의는 가장 소중한 바람이었지만 새로운 법치국가는 정의를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었다. 감시가 일상화됐던 일당 독재 체제하의 동독에서 자행됐던 불법행위들에 대한 사법 차원의 청산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사법상의 불소급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동독 시절에는 적법했던 동독의 사법처리 사안들에 관해 서독 법에 따라 정당성을 박탈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나치즘을 청산해야 했던 시절에도 이미 부딪쳤던 문제였으며 정도가 중한 범죄행위를 추적하기 위해 소위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를 일반적인 기준으로 도입한 바 있다.

불소급 원칙 탓 극소수 인원만 사법 처리

동독 시절 반정권 운동을 주도했으며 통일 이후에는 정치인을 거쳐 독재청산재단 이사장이 된 라이너 에펠만.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동독 시절 반정권 운동을 주도했으며 통일 이후에는 정치인을 거쳐 독재청산재단 이사장이 된 라이너 에펠만.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동독의 경우에는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무장하지 않은 동독 주민에 대한 동독 국경 수비대원의 기총사격이 이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동독에서 행해진 일반적인 여러 부당행위는 그러한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까닭에 극소수의 인원만이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에곤 크렌츠나 한스 모드로우와 같은 동독 지도부 인사들조차도 매우 경미한 처벌을 받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SED 후신 정당(지금의 좌파당)은 동독 시절의 독재를 미화하려는 시도를 체계적으로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SED 독재가 남긴 잔재에 대한 정치적인 청산 요구는 거셌다. 이에 따라 독일 연방의회는 92년 3월 ‘SED 독재의 역사와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95년 9월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SED 독재 잔재 극복’이라는 명칭의 제2차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98년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해당 조사위원회는 정치적, 역사적 분석 작업과 정치적, 윤리적 평가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사법부와 슈타지 문서보관소가 사법상의 청산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구동독의 대표적인 반정권 인사였던 라이너 에펠만 의원을 비롯한 22명의 연방의회 의원들과 교수 및 증인들로 이루어진 12명의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제1차 위원회가 활동했던 92년부터 94년 사이에만 44차례의 공개 청문회와 37번의 비공개 청문회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총 327명의 증인과 학자들의 진술을 청취하는 한편 1만5000쪽이 넘는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다.

두 차례의 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청산 작업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해당 과제의 수행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결과 98년 독재청산재단이 설립됐고 에펠만이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의 로고.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의 로고.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이렇게 설립된 독재청산재단은 각종 관련 프로젝트의 수행을 지원했다. 관련 단체나 학자 및 교육기관들을 지원하고 SED 독재 희생자들에 대한 자문활동을 수행했다. 독재청산재단은 또한 유럽 내에서 공산독재 청산을 담당하는 하나의 거점기관으로 발전했다. 장학사업도 진행하고 있으며 2001년부터 75명 이상의 젊은 학자들을 지원했다. 수행 과제의 핵심내용은 소련 점령지역 및 동독 시절의 저항 운동과 정치적 박해 그리고 SED 독재의 탄압이다.

SED가 보유했던 자산 중에서 7500만 유로를 독재청산재단의 설립 재원으로 활용했는데, SED의 자산이 드러난 것은 마치 범죄 소설의 내용과 흡사하다. 89년 12월 9일에 열렸던 SED의 특별전당대회에서 당 자산을 지키기 위한 내부 그룹이 결성됐다. 자산 규모는 62억 동독마르크의 현금과 기금 외에 소유하고 있는 출판사와 기업들 그리고 부동산이 포함돼 있었다. SED의 후신 정당인 민사당(PDS)은, 해외 이전 및 충성심이 강한 관리자가 경영하는 수백 개의 기업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해당 자산을 숨기려는 시도를 다각도로 이행했으며, 전부는 아니었지만 상당 부분 성공했다. 신탁관리청 및 연방 사법부와의 수년간에 걸친 분쟁이 지속됐으며 일부 자산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오스트리아 또는 다른 지역에 있는 불분명한 경로를 통해 사라졌다. 어쨌든 독일 연방 구동독 SED 독재청산재단은 남은 해당 자산을 이용해 설립이 가능했다. 상징적인 정의의 실현이라고나 할까?

독재청산재단 외에 여러 개의 중요한 기억의 장소들(박물관들)이 존재한다. 그중 한 곳이 베를린-호엔쉔하우젠에 있는 슈타지가 운영했던 심문을 위한 중앙감옥이다. 이곳은 46년부터 50년까지는 소련의 정보부가, 51년 이후에는 슈타지가 수천 명에 달하는 반 정권 인사들을 심문하던 감옥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이 자행됐다.

동독 시절에 이 감옥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이곳은 94년부터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청산 작업과 관련된 문제점 중 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 동독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감옥 주변에는 예전에 이곳에 근무했던 가해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감옥이 박물관으로 바뀐 이후에 그곳에서 안내와 설명을 맡은 사람 중 동독 시절에 실제로 이곳에 수감돼 피해를 본 증인들이 있는데 이들이 일을 하기 위해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인근에 거주하는 가해자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2006년부터 슈타지 간부들이 주축이 된 일단의 무리가 이 박물관의 공식 행사나 시설 안내 시에 야유와 훼방을 하여 과거 진상의 설명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당시 베를린시의 문화 담당 장관이 SED의 후신 정당인 민사당 소속 토마스 플리에를이었기 때문에 슈타지 희생자를 조롱하거나 슈타지가 자행했던 테러를 미화하는 데 대해서 어떠한 이의도 제기된 바 없다. ‘스탈린주의 희생자 연합’과 같은 희생자 단체들은 지금까지도 구동독의 독재가 남긴 잔재를 미화하는 행위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슈타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치기도

‘스탈린주의 희생자 연합’은 자체 정간물 ‘철조망’을 발행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스탈린주의 희생자 연합’은 자체 정간물 ‘철조망’을 발행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정부문서보관소]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가능한가? 1933년부터 45년 사이의 나치 독재와 45년부터 89년 사이의 소련 점령 시기 및 구동독 공산 독재를 겪은 후에 독일은 정치교육(민주시민교육)을 통해 특히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심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역사적인 기억들이 희미해지면 새로운 도전과제가 나타났을 때 과거에 존재했던 미혹의 정치가 종종 새로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다시 출현한다.

실제로 과거 SED 그리고 민사당의 후신 정당인 지금의 좌파당은 작센주를 제외한 모든 구동독 지역 연방주들에서 여당의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튀링겐주에서는 2014년부터 주 총리직을 수행 중이다. 옛서독 지역인 브레멘시에서도 좌파당이 여당의 연정 파트너가 됐다. 게다가 기업과 주택의 사회화(국유화)와 같은 많은 오래된 사회주의적 요구들을 좌파당원들에게서만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민당의 젊은이들에게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치로 인한 명백하게 잘못된 결과에 관해서는 구조적인 시도로 인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SED 독재의 청산은 실패한 것인가? 물론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교훈이 지니는 한계를 인식할 필요는 있다. 모든 세대는 결국 자신들의 자유를 스스로 지켜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역사와 청산의 경험은 단지 참고사항일 뿐이다.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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