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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 아내의 유혹 이전에 도스토옙스키 '막장드라마' 있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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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호 면

김정아 스페이스눌 대표가 28일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현동 기자

김정아 스페이스눌 대표가 28일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현동 기자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가 탄생한 지 올해로 200주년. 그를 기리는 기획으로 출판계가 분주한 가운데 도서출판 지만지의 4대 장편 한정판 시리즈가 눈에 띈다. 짙은 초록색 가죽 양장에 24K 금박 장식이 돋보이는 권당 22만원짜리 초호화판이다. 넘버링까지 매겨 딱 100부씩만 찍는 시리즈의 첫 권 『죄와 벌』이 지난주 출간됐다.

라이프 인플루언서: 번역가이자 패션사업가 김정아

다 팔려도 출판사는 2000만원 손실이라는데, 왜 이런 책을 만들까. 지만지 박영률 대표는 “저자와 역자에게 보내는 오마주다. 역자가 4대 장편을 무사히 한국어로 옮겨 도스토옙스키를 온전한 한국어로 부활시켜 줄 것을 믿는다”면서 ‘100년 갈 번역’임을 자신했다. 도스토옙스키 고유의 개성을 지키면서도 트렌디하고 신선한, ‘힙’한 번역이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는 소울메이트” 

비밀은 역자의 이력에서 엿보인다. 프로젝트를 홀로 떠안은 김정아(52) 박사는 별난 사람이다. 서울대 노문과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역서를 17권이나 낸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이면서, 데바스티·스테판슈나이더 등 패션 피플들이 열광하는 명품 브랜드 십여 개를 한국에 도입한 패션기업 스페이스 눌의 CEO다.

패션계 큰 손이면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유별난 사랑으로 번역을 계속해 왔다지만, 4대 장편 완역은 도전이었다. “도스토옙스키 장편 완역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저도 편역 위주로 해왔기에 완역 제안은 거절하려 했어요. 제대로 하려면 오랜 기간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나니까요. 그런데 박영률 대표가 찾아와 제 번역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영혼의 스파크를 느꼈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더군요.(웃음)”

자칭 “도스토옙스키와 소울메이트”라는 그는 평소 한국어 번역본에 불만이 있었다. 유명 출판사의 전집조차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유명한 책은 간혹 성실한 번역본도 있는데, 그런 번역자조차 덜 유명한 작품은 대충 한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여럿이 나눠 했으면 감수라도 제대로 해야죠. 어떤 작품은 주인공이 벼랑 끝에 서서 삶을 끝낼지 고민하는 순간을 ‘뛰어내리면 재밌을까’라는 투로 번역해 놨길래 엉엉 울었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이 들어간 작품에 난도질을 한 건데, 번역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 났던 도스토옙스키의 책이 극도로 화려하게 마감된 것도 번역가에 대한 존중의 뜻이 담겨있다. 박영률 대표는 “출판사가 번역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전달하는 메시지”라고 전했다. “번역가를 제대로 대우했다면 나쁜 번역이 나왔을까요. 데보라 스미스가 아니었다면 한강이 맨부커상을 못 탔겠죠. 역자도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해요. 이 정도 수작업이 들어간 한정판은 해외에서 보통 100만원쯤 하는데, 출판사가 손해를 보면서 역자를 대우하는 책을 만들어주신 거예요.”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자극적인 요소가 많다. 부자지간에 한 여자를 두고 싸우거나, 사각·오각 관계로 펼쳐지는 치정극은 요즘 막장 드라마 못지않다. “그는 빚이 많은 가난한 귀족이었어요. 당시 소설은 페이지당 돈을 받았죠. 빚을 갚으려면 많이 써야 하니까 연재를 했는데, 드라마가 다음 회를 꼭 보게 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설정은 막장이어도 그 속엔 어마어마한 철학이 담겨 있잖아요. 톨스토이처럼 가르치려 들지 않고 독자가 사색할 여지를 줬기에 더 위대한 것 같아요. 예컨대 『안나 카레니나』를 도스토옙스키가 썼다면 제목이 ‘안나의 사랑’일 걸요. 톨스토이가 ‘카레닌의 부인 안나’라는 제목을 붙인 건 ‘얘는 불륜이니 벌 받을 거야’라는 자세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캐릭터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했겠죠.”

인문학자 마인드로 사업도 접근

1980년대 흔치 않은 ‘서울대 멋쟁이’였다는 그는 유학 후 강사를 하다 2007년 우연한 기회에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하던 지인의 부탁으로 유명 배우의 패션 사업을 돕게 된 것이다. 그 배우는 곧 떠났지만, 잠시 도와주기로 했던 그는 외려 발이 묶였다. 인연을 맺은 해외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전폭적인 신뢰 덕분이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한국 시장에 맞춰 개선해 가는 그만의 방식은 스페이스 눌이 코로나 시국에도 흑자를 내고, 대기업도 손 못 대는 브랜드 독점권을 여럿 보유한 이유이기도 하다.

“패션계에서 작은 회사들이 못 살아남는 이유가 있어요. 브랜드를 키워 놓으면 대기업이 다 가져가니까. 제 브랜드도 대기업이 컨택했지만, 못 가져갔죠. 그런데 그들은 숫자만 보더군요. 한 시즌 못 팔면 바로 팽개치죠. 하지만 저는 괜찮은 브랜드를 찾아도 덥석 사들이지 않아요. 매 시즌 찾아가 우리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타진하죠. ‘프랑스의 꼼데갸르송’이라는 데바스티도 올해부터 제가 전세계 독점 판권을 갖게 됐지만, 처음 2~3년간은 훈수만 뒀어요. 저 같은 바이어는 세계에 또 없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나올법한 까칠한 파리지앵들이 지금은 제가 셋 있으면 좋겠대요. 파리와 한국, 그리고 시장이 큰 일본에 하나씩 말이죠.(웃음)”

그는 이런 접근법이 인문학자이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패션MD계의 바이블’로 통하고 있는 『패션MD』 시리즈를 낸 것도 인문학자라서고, 최근엔 『인문학이 밥 먹여준다』(가제)는 책도 준비 중이란다. “돌아보니 제가 딜하는 모든 방식이 경영 마인드가 아니라 인문학 마인드더라고요. 열흘 굶은 아버지와 아들이 빵을 주웠다면 어떨까요. 경제학자는 반으로 나누라고 하고, 과학자는 아들이 신진대사가 빠르니 더 먹으라고 하고, 법학자는 발견한 사람이 다 먹으라고 할 테죠. 인문학자는 아들이 주워도 아버지에게 다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 아들을 키운 아버지라면 아들에게 더 먹으라고 양보할 테니까요. 결과는 같을지 몰라도 인문학이 다스리는 사회는 수준이 다른 세계죠. 『패션MD』를 낼 때도 전화번호 하나 공유 안 하는 업계에서 영업 비밀을 왜 공개하느냐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똑같은 시행착오를 모든 사람이 반복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나요.”

인문학 덕에 비즈니스가 성공했지만, 사회생활이 공부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 오직 한길’만 파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공부할 때는 도스토옙스키 관련 논문만 따라가기도 바빴죠. 지금은 앙드레 지드나 밀란 쿤데라까지 영역을 넓혔어요. 다른 나라 브랜드를 통해 배운 것도 많죠. 이탈리아의 한 브랜드 CEO가 거짓말을 자주 하길래,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모조리 읽었어요. 그제서야 알겠더군요. 도시 국가로서의 역사 때문에 로열티가 아니라 실용성이 우선인 민족인 거죠. 민족성에 따른 국가별 협상법도 공부를 많이 했어요.”

학업과 사업을 둘 다 천직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저녁이 없는 삶’이라서다. 실제로 그는 매일 저녁을 먹지 않고 8~9시면 잠이 든다. 그리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동틀 때까지 번역을 한다. “남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면, 저는 새벽이 있는 삶이죠. 도스토옙스키를 만나는 시간은 놀이와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몇 시간도 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상대성 이론을 매일 느끼고 있죠. 그 새벽이 없다면 버틸 수 없을 거예요.”

남들이 시샘할 만한 인생 2모작에 성공했지만, 가장 잘한 일은 “애를 셋 낳은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애들을 키우면서 인생을 긍정하게 됐어요. 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애들에게는 단 한번도 푸시한 적 없는데, 그래서 더 잘 자라준 것 같아요. 고3인 막내가 게임 매니어인데, 요즘 게임엔 신화가 녹아 있어요. 게임을 못하게 하는 대신 게임 속 신화에 관한 책을 사주니 자연스럽게 신화를 공부하더라고요. 엄마들이 좀 기다려줘야 해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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